용기
결혼 후 7년, 큰 아이를 낳은 나이가 만 36세였다. 우선은 무엇보다 육아가 중요했다.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하던 회사들에게 당분간 일을 쉬어야 한다고 전했다. 2년 정도 지나면 작업도, 일도 다시 할 것이라 믿었다. 계획과 달리 둘째 아이가 생겼다. 세상 일은 알 수가 없다.
어느 부모나 그러하듯 아이들은 너무너무 사랑스럽다. 그들은 자연의 힘을 알려주었고, 내 안의 두려움을 일깨웠으며 온 우주와도 같다. 그 마음은 한결같다. 변할 수가 없다.
다만 내가 예상한 2년은 4년이 되고 있었다. 경력은 단절되고 상실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사랑을 얻고도 상실감을 느끼는 나로 인해 자책감에 시달렸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면, 자녀의 탄생을 기준으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전혀 다르다. 엄마에 관한 통념은 임신과 출산의 순간부터 모성으로 충만할 것 같지만 아이에게 세상이 처음이듯 나에게도 엄마의 역할은 처음이다. 엄마로서의 나를 받아들이는 적응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은 모성애와는 조금 다른 부분인 것 같다. 아마도 그 적응의 시간에 많은 엄마들은 환희, 사랑, 책임, 우울, 상실을 오가는 롤러코스터를 탄다. 아이가 자라듯 엄마인 나도 성장 중인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그러던 어느 날, 붙박이장을 열어 실과 바늘을 모두 버렸다. 폭풍 같은 감정은 아니었다. 당시는 아주 담담했고 여느 날처럼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이후 그날을 돌이켜보면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탑승한 롤러코스터가 늪에 빠져 있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아이를 위해서도 변해야 했다.
우연히 한 리테일 기업에서 파트타임 재봉 직원을 구하는 페이지를 보았다. 주당 20시간. 아주 즉흥적이었다. 일정에 대한 계획도 없었다. 이력서 지원 후 문제는 공업용 재봉틀로 면접을 봐야 하는데 사용해 본 지가 10년이 훌쩍 넘었다. 나는 전에 없이 용감해졌다. 집 앞 옷수선 가게 앞을 한참 왔다 갔다 서성이다가 용기를 내어 문을 열었다. 4년을 살면서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수선집이었다.
"사장님, 저... 부탁이 있는데요..."
면접을 볼 수 있도록 공업용 재봉틀을 가르쳐달라는 뻔뻔하고 어이없는 부탁에 사장님은 흔쾌히 의자를 내어주셨다. 한 시간 정도를 하다 보니 손에 감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현금은 한사코 안 받으신다며 오히려 응원을 주신 사장님이 감사해서 선물을 억지로 쥐어드렸다. 그리고 3주 뒤 나는 첫 출근을 했다.
재봉 직원으로 근무한 1년 동안 공업용 재봉틀에 완전히 익숙해질 수 있었다. 오가는 많은 고객을 만나며 사회성도 되찾았다. 근무 조건이 더 좋은 팀으로 옮겼고, 퇴근 후 개인 작업을 다시 시작한 게 벌써 4년 전이다.
지금의 나는 다시 실과 바늘을 모으고 있다. '아니스시나(ANIS SINA)'로 이전보다 작업에 더 몰두한다. 평생 즐기게 될 것임을 확신하니 조급하지도 않다. 더 이상 실이나 작품을 쓰레기통에 넣을 일은 없다.
어디에나 돌부리가 있고, 무엇에나 처음이 있다. 미미하더라도 첫걸음을 걸어야 한다.
가다가 방향을 틀어도, 되돌아와도 된다. 예상보다 훨씬 멀리 갈 수 도 있다.
어쩌면, 어쩌면 운이 좋아서 광활한 대지나 바다를 만날지도 모르지 않을까.
뜨개에도 첫걸음이 있다. 작은 고리 하나에서 시작한다. 작은 점이 모여 면이 되고, 벽돌 하나에서 시작해서 집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 내가 뜨개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이 작은 고리를 뜨개질에서는 '코'라고 한다. 다음 코가 엮이면서 사슬을 이룬다. 코바늘 뜨기로 사슬 한 줄을 만들었다면 종이에 선을 하나 그은 것과 같다.
모자나 티코스터처럼 결과물을 명확하게 정하고 시작할 때도 있지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냥 사슬을 만들어 보기도 한다. 전자든 후자든 무언가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변화가 즐겁다.
아주 쉽고 작은 사슬 한 코,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한 코, 두 코가 한 줄이 되고, 한 즐, 두 줄...
그러다 어느 순간 꽤 그럴싸한 작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