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니스시나 Feb 13. 2024

무엇을 만들고 싶은 지

쓸데없는 기억들로부터

바둑.

사람과 대화하기를 좋아하고 술도 꽤 즐기시는 외삼촌은 국어 선생님이셨다. 나는 막연히 삼촌이 국어 선생님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정년을 채우지 않고 관두셨는데 직업이라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를 어린 나이임에도 이 소식이 아쉬웠던 기억이 있다. 외삼촌은 10살 남짓한 나를 앉혀두고 바둑을 알려주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러셨나 싶다. 내 딸을 볼 때 도무지 바둑을 제대로 이해하고 재미 붙였을 리가 없는 나이였는데 싶어서다. 그저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게 재미있으셨나. 뭐 그렇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한다. 말씀하기를 좋아하는 분이시니.

바둑은 집을 짓는 거라 하셨다. '네'

이렇게 돌을 두면 너는 이렇게 돌을 두고. '네'

잘 모르지만 '네' 

아무튼 집을 짓고 땅을 넓히는 거야. '네'

흰돌을 가운데 두고 주변에 검은 돌이 이렇게 감싸면 흰돌은 먹힌다. '네... 모르겠는데...'

바둑두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았지만 마음에 드는 부분은 한 가지 확실히 있었다. 대국 끝 바둑판 가득 채워진 흰 돌과 검은 돌. 흑백이 나무판을 가득 덮은, 그 모습은 꽤 멋져 보였다.

바둑알 하나만 볼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유기적으로 얽혀 거대한 하나의 그림으로 느껴졌다.

지금 나는 바둑알을 보고 있나? 바둑판을 보고 있나?




어릴 때의 나는 꽤 조용한 편이라 외할아버지나 외삼촌, 이모가 예뻐하셨다는 엄마의 말을 떠올려본다. 어른들에게 성가시지 않았나 보다. 하긴 외할아버지는 무뚝뚝하셨음에도 불쑥 나를 약수터나 송도, 태종대 앞바다에 자주 데려가셨다. 짧은 산행을 하기도 하고 가만히 바다에 앉아있다 오거나 회를 사주기도 하셨다. 

친척들은 가까이 살았고 자주 모였다. 조카인, 손녀인 우리는 이쁨을 받았다. 어느 장독이나 뚜껑 열면 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 많은 끼니를 함께 하고 자주 보던 어른들이 어느 날부터 멀어졌다. 아이의 눈으로는 알 수 없는 어른들만의 세상이 있다. 나의 눈에도 그러했다.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 

그저 크면 알게 되겠지 했다. 

20대 중반쯤 되어 보니 마음이 건강한 어른들이 아니었구나 싶어 씁쓸해졌었다. 

시간이 더 흘러 30대 중반이 되니 혈연이라고 하여 반드시 화목한 것만이 정답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40대가 되니 그저 다 각자의 삶, 각자의 몫, 각자의 연(緣)이 있구나 싶어졌다. 

50대가 되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The End Of Autumn / wish pouch


땅따먹기.

해가 쨍한 날 체육 시간. 열 맞춰 운동장에 앉아 순서를 기다린다. 달리기. 철봉... 지겹기 짝이 없다. 왜 그렇게 흥미가 없었는지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안다. 나는 경쟁을 전혀 즐기지 않는다. 승부욕이 도무지 오르지 않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늘 나의 근본적인 질문은 도대체 왜 그걸 쟁취해야 하는데? (그런 내가 현재는 리테일 회사에 있다. 나의 세계관과 늘 충돌 중인데 이것은 회사는 모르는, 나만 아는 감정이다.)

무료해서 친구들과 흙바닥에 돌을 튀기며 땅따먹기 놀이를 했다. 30년도 더 된 일이라 정확한 방식이 잘 기억나지 않는데 '탁'하고 튕긴 돌이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날아간다. 돌이 떨어진 지점까지 선을 긋는다. 이런 식으로 나의 영역을 확장해 간다. 햇살, 반사된 모래 빛, 모난 자갈이 사진처럼 떠오를 때가 있는데 이 장면에는 항상 커다란 세모가 오버랩된다. 세모를 그리면서 땅이 확장되었나? 그 시간으로 돌아가서 확인할 수도 없고 물음표다. 




Jeju 시리즈 작업 중 

코 하나가 결국 면이 된다.

고리 하나로 시작한 뜨개가 1센티, 2센티... 10센티가량의 네모가 된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여기서 멈출 수도, 계속 계속 덩어리를 키울 수도 있다. 언제 멈출 것인지는 내가 정하기 나름인데 그때를 정하는 것이 어렵고 중요하다. 무엇을 만들 것인지 알아야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삶, 사는 문제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나의 영역과 지면을 멈출 것인가? 계속 키울 것인가? 나는 무엇을 만들 것인가?

나는 단편적인 덩어리들이 많이 모으면서 만들어 가는 중인 듯하다. 어떤 이는 하나의 고리를 끊지 않고 계속 키우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옳고 그름은 없지만 내가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는 어렴풋이나마 알아야 하는 것 같다. 그래야 살아가면서 행복을 더 자주 느낄 거 같거든.


작가의 이전글 'BASIC'의 힘, 짧은 뜨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