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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 Mar 10. 2024

농사여행 #5

동네사람들 모두 모여 연말파티

지금 스페인 남부지역 바르바테 근처에 머물고 있다. 영국에서 온 제이크가 작은 리트릿센터로 꾸미고 있는 이곳은 이번 스페인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것 같은 곳이다. 지금까지 머물렀던 곳 중에서 가장 마음이 편하면서도 더 일하고 싶은 에너지를 주는 곳이다. 여름에만 손님을 받고 겨울인 지금은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요가 데크 만들기, 생태 화장실 만들기, 나무 심기, 펜스 만들기 등. 흙으로만 반죽해서 벽돌을 쌓은 경험이 있는데 그것과 이것은 매우 달랐다. 몇 시간만 지나면 굳기 시작하고 단단하기까지 한 시멘트를 직접 만져보며 흔하고 가까웠던 재료를 새롭게 경험하고 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시멘트 작업을 했다. 어제는 모래를 수레에 가득 담아 옮기다가 허리를 삐끗했다. 몇 년 전 사고로 금 갔던 허리가 종종 이렇게 말썽이다. 아휴. 오늘은 힘을 많이 쓰는 일을 줄이고, 시멘트 반죽 옮기는 일, 어제 만든 기둥석 모양을 스펀지로 다듬는 일을 했다. 원하는 모양을 위한 틀을 만들어두고 거기에 시멘트 반죽을 채워 몇 시간이 지나면 그대로 굳는다. 시멘트가 얼마나 친환경적인지는 잘 모르지만 꼭 필요할 땐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은 2023년 마지막 날을 맞이해서 마을 사람들과 게더링을 하기로 한 날이다. 어제 시내에 나가서 장을 넉넉히 봐왔고, 제이크가 친구들에게 각자 먹을 것을 가져오라고 해놓은 상태라서 우리는 바비큐 재료와 후무스, 채소꽂이를 준비했다. 후무스를 위해 어제부터 불려놓은 병아리콩을 삶았고, 바비큐에 구울 채소를 다듬어 소스를 묻히고 꼬챙이에 꽂아놓았다. 스페인에서 갔던 곳마다 병아리콩을 즐겨 먹어서 나도 이제 익숙하게 후무스를 만든다. 정말 간단하고 맛있는데 한국에는 병아리콩이 나지 않으니 선비잡이콩으로 해볼까 생각 중이다.


치즈케이크를 만들어 온 사람, 샐러드와 비건 소시지를 가져온 사람, 채소피자를 만들어 온 사람 등. 각자의 방식으로 음식을 포장해 온 것도 재밌었는데, 대부분 일회용품을 쓰지 않고 음식을 가져온 것이 보기 좋았다. 각자 양손 가득 음식을 챙겨 온 친구들 덕분에 정말 배가 산처럼 부르도록 긴 식사를 했다. 오랜만에 바비큐로 이것저것 굽는 것도 즐거웠다. 시도 때도 없이 차와 커피를 즐기는 영국사람들 덕분에 마지막은 치즈케이크와 티를 함께 먹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독일어, 스위스어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괜찮았다. 이 사람들이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외국인이었다면 얼마나 대화를 했을까? 한국인이라면 대화를 많이 했을까? 내성적인 나에게 게 어쩔 수 없이 대화를 못하는 상황은 반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각자 가져온 음식들을 나눠먹으며 충분히 따뜻한 연말의 분위기를 만끽했다.



치우는 것도 금방 끝이 났다. 황급히 일어나 설거지를 하는 사람, 남은 음식을 통에 넣는 사람, 테이블을 닦는 사람 등, 모두가 최대한 참여하여 뒷정리를 마무리했다. 이렇게 협동적인 게더링이라니! 모두가 가고 나와 눅잔만 남았다. 어제 장 볼 때 사온 까바를 열고 간단하게 바게트를 구워 먹었다. 한두 잔밖에 못 마실 테지만 이런 낭만을 놓칠 수 없다. 히터에 장작을 넉넉히 넣어두고 간 제이크 덕분에 등을 지지며 따뜻하고 배부른 연말을 보냈다. 새해엔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행복한 상상을 하면서. 결국은 사람이 중요하다는 말을 여기 와서 또 실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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