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화단
세 번째로 소개해 드릴 책은 미즈나기 토리 작가님의 <행복은 먹고 자고 기다리고> 입니다. 평소 일상 만화를 무척 좋아해 주기적으로 새로운 일상 만화 없나 하고 찾아보는 편인데 표지를 보고 팍 느낌이 왔었습니다.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던 사토코는 몸 건강에 이상이 생김으로 인해 회사를 그만두고 주에 3번 일하는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합니다. 그렇게 지내던 와중 살고 있는 집이 계약 만료(와 함께 갱신료 공지장)가 되어 이사를 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만나게 된 이웃 주민들과의 일화를 담고 있는 만화입니다.
만화 속에서 사토코가 잠자리에 들고, 잠에서 깨기 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모습들이 편안하거나 개운하거나 나른한 이미지가 아닌 쓰다 만 휴지처럼 구겨지고 어딘가 어두운 느낌이 풍기는데 이런 반복되는 표현들이 무척 좋았습니다. 앞서 줄거리에 사토코의 건강에 이상이 있다 말씀드렸는데 그런 부분들을 인물들의 전개나 표정을 통한 직접적 언급이 아니라 생활 속에 스며드는 느낌으로 표현되어 있어 좋았습니다.
이사 후 만나게 된 주민(츠카사와 스즈)을 통해 약선(藥膳 약이 되는 음식)을 알게 되는데 그러면서 건강을 잘 챙기려 노력하는 사토코를 응원하게 됩니다. 약선에 재미를 붙이며 주민들과 소소한 대화, 교류를 하게 되면서 사토코의 몸과 마음에 조금씩 변화가 생깁니다. 1권 초반 사토코의 잠들기 직전의 모습과 후반의 사토코의 모습이 달라서 괜히 마음이 찡했습니다. 여러모로 인물을 응원하게 되는 만화였습니다.
<행복은 먹고 자고 기다리고>에서 가져온 키워드
휴식
변화
행복
아래부터는 에서 가져온<행복은 먹고 자고 기다리고> 3가지 키워드로 제가 창작한 단편 소설 [마음의 화단] 으로 이어집니다.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기 직전의 시간. 너무 뜨겁지 않은 햇볕이 도영의 팔을 타고 흐른다. 미세먼지 농도를 확인하지 못한 채 창문을 열고는 아차 싶었지만 시야를 가리는 햇볕 너머로 바라본 하늘은 조금의 흐릿함도 없이 맑다. 흡 하고 코로 공기를 들이키니 이건 뭐 볼 것도 없이 미세먼지 농도는 좋음일 터였다.
그러고 있다 보니 나른한 하품이 절로 나온다. 왜 식욕은 음식을 먹으면 잠잠해지는데 수면욕은 잠을 잘수록 더 고파지는 걸까?
이직 당시 3달 쉬었던 걸 제외하면 도영은 횟수로 8년을 사회의 수레바퀴로 살았다. 출근 시간에 맞춰 새벽 6시에 일어나 준비하는 게 당연했는데 며칠 만에 10시를 넘겨 일어나는 게 당연해졌다. 하긴 출근 시간 지옥철에 몸을 맡기며 흔들거릴 때마다 어김없이 하품이 찍찍 나오긴 했었다. 그런데 이런 여유로운 하품이라니 며칠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나른한 몸을 이끌고 베란다로 걸으니 그곳엔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화단용 도구들이 늘어져 있었다.
끝 모양이 다른 삽 3개와 화단용 흙 한 포.
도구를 순서대로 바라보던 도영은 제일 중요한 걸 잊은 사람처럼 아 하고 외마디를 뱉고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갈 꺼냈다. 손바닥 두 마디 정도로 작은 종이 뭉치는 테이프로 틈새 없이 꼼꼼히 감겨 있었다. 어제 채소마켓에서 나눔 받은 씨앗이었다.
상추,방울토마토,강낭콩...
식물을 키운다면 꼭 먹을 수 있는 걸로 키우고 싶었다. 별 이유는 없고 그래야 정성을 쏟아 키울 거 같았기 때문이다.
볕 좋은 곳에 등지고 앉아 신문지를 깔아둔 바닥에 용품들을 모두 늘어놓는다. 그러곤 화분 밑에 바닥망을 깔고 흙 포대 가장자리를 잘라 잘 넣어준다. 어느 정도 찼다 싶으면 물을 부어 흙바닥을 꾹꾹 눌러주길 반복. 그러던 중 옆에 아무렇게 놓아둔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울린다. 입사 동기인 서정이다. 이젠 그냥 친구지만.
"어"
"여보세요? 너 몸은 좀 어때 괜찮아? 프로젝트 때문에 바빠서 연락을 이제 하네. 근데 너 진짜 이렇게 그만둘 거야? 계속 안 좋은 거면 차라리 휴가를 내. 너 이 프로젝트만 끝나면 승진은 예정된 거잖아. 난 너가 차려둔 밥상 그냥 숟가락만 얹는 짓 하기 싫어."
서정은 내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봤던 날 이후보단 멀쩡해 보였는지 와다다 쏘아붙였다. 뭔가 말을 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이 상황이 재밌게 느껴져 그냥 듣고만 있었다. 서정의 쏘아붙이는 말이 내가 화분에 쏟아붓고 있는 흙 속의 자갈 같아서. 서정의 말도, 흙 속의 자갈도 전혀 그런 소리는 나지 않는데도 데굴데굴 도로록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도로록 도로록 데굴데굴
"너 듣고 있어?"
잠시만 내가 말이 없자 서정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젠 그 한숨조차 도로록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어 듣고 있어. 근데 내가 지금 좀 바빠서 나중에 전화할게."
"뭐 하고 있는데?"
"상추 심어"
"뭐?"
마지막으로 본 내 모습이 퍽 충격 이긴 했나보다. 서정 성격에 벌써 큰소리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상추란 말을 듣자마자 서정의 목소리는 내 생각을 깨듯 점점 커졌다.
"뭐 상추?!"
"어. 심으려고 채소마켓에서 나눔 받았어. 포장도 엄청 귀엽다?"
"야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그래서 내가 지금 좀 바빠. 너도 아까운 점심시간 알차게 보내. 퇴근하고 연락하자."
휴대폰 너머로 서정의 야! 하는 외마디가 들렸지만 도영은 전화 종료 버튼을 누르곤 휴대폰을 원래 있던 자리에 두었다. 서정이 이후 할 말들은 모두 도영에겐 과거가 되었기 때문에.
잦은 야근으로 몸이 망가졌다. 여느 때처럼 회의를 하던 도중 갑자기 호흡이 가빠져 쓰러졌고 병원의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떴을 땐 그린 듯한 의사같이 생긴 의사에게 과호흡이라는 말을 들었고 왠지 모르게 도영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났고 그 길로 퇴원 수속을 밟고 바로 사직서를 제출한 일들 모두. 도영에겐 과거였다.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아주 멀게 느껴지는 그런 과거.
앞으로의 일이 어찌 될지는 알 수 없다. 출근 퇴근 집이 자연스러운 일상이었고 몇 년 뒤에는 다를까 생각도 했지만 그게 며칠 후의 일이 될지 알 수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그 당연한 걸 오래 잊고 살았다. 앞으로의 일이 어찌될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을.
상추,방울토마토,강낭콩.
오늘은 화분에 씨앗을 심을 것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 햇볕이 잘 보이는 곳에 화분을 두고 흙이 마른듯하면 물을 주고 또 싹이 나면 기쁘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