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한 나라의 왕이 되어 나라를 망하게 하고, 후세에까지 치욕스러운 이름으로 남아있느냐! 하고,
또 사람들은 말한다.
사내 장부로 태어났으면, 짧은 인생, 다 해보고 죽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고...
역사학을 전공한 학자들은 백제 이야기만 나오면 비분강개하여 열변을 토하곤 했다. 자기네들의 권력욕을 위해 남의 나라와 손잡고 제 민족 사람들에게 화총을 겨눌 수 있느냐고 말이다.
끈질기게 저항하는 백제인들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수호하는 용을 잡아야만 한다 해서 소정방이 백마를 던져 용을 낚았다는 전설의 백마강이 지금도 유유히 흐른다.
적군들에게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으로 절개를 지키고자 하얀 쓰개치마를 뒤집어쓰고 뛰어내린 삼천궁녀의 낙화암. 나당에 백제를 받치며 목숨을 구걸한 왕과 귀족들과 다르게 투항하지 않고 반드시 돌아와서 나라를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보물들을 들판으로 묻어두고 떠난 유민들이 있다.
일제 강점기, 밭을 가는 농부에 의해 출토된 금동관음보살입상(국보 제128호)이 생생한 증거이다. 통일신라에 귀속되어 임금을 섬기기보다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새로운 시대를 열고, 후백제를 세워 통일신라에 대항한 나의 선조들. 우스갯소리로 백제땅에는 묻어 두고 간 보물들이 아직 그대로 있으니 호미를 들고 캐어 보라고도했다.
어디에서는 바위에서 꽃이 피는데(花巖寺), 어디에서는 꽃이 떨어진다( 落花巖).
피고 지는 것을 그 누가 막을 수 있으랴마는 패망한 나라에서는 꽃이 저절로 진다.
그래서일까, 백제의 후예들이 삼천궁녀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중창한 고란사에서는 고란초가 하나둘 피어났다고 한다. 넋의 꽃이다. 패망한 나라에 서면 저절로 서글퍼진다. 도읍을 돌아다닐 때에는 함부로 웃을 일이 아니다. 풀 한 포기조차 밟으면 아니 된다. 또, 어찌 알겠는가. 그들의 넋이 풀이되고, 꽃이 되고, 난초가 되었는지를.
"장성 댁, 노래 한 자리 해보소."
농번기가 돌아오기 전, 동네 계꾼들과 화전놀이를 나가면 어머니는 노래를 불렀다.
비단 어머니뿐 아니라 거게 모인 아녀자들, 한 사람씩은 노래를 불러야 했는데 첫 소절만 부르면 나머지는 모두 합창을 하는지라, 남사스러울 것도 없는 자리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것조차 수줍어서 안 부르겠다고 손사래를 치지만 우악스러운 아줌마들이 어머니를 억지로 세워서 기언코 노래를 부르게 했다.
막걸리가 불콰하게 오른 얼굴로 수줍게 일어서서 바로 부르지 못하고 첫 입이 안 떨어지는지 좀처럼 소리를 내지 못했다.
"뭐시 부끄럽다고 저리 뺄까잉? 그냥 아무거나 막 불러 불어~ 뒤에 임실댁 기다리고 있당께."
구시렁 면박을 당하면서도 어머니는 입만 달싹거리며 뜸을 들이다, 한참이 지나서야 조그마한 소리로 고개를 숙이며 노래를 불렀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잊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그렇게 노래를 다 부른 뒤에는 펑펑 우셨다. 아니 노래를 부르다 중간에 울면서 노래를 불렀다. 우리 어머니 혼자만 우시는 건 아니었다. 모두 같이 우셨다. 겨우 노래를 끝내고 앉으시면
"아니, 이 좋은 날에 꽃놀이 와서울고 그랴, 술맛 떨어지게."
"아니, 노래가 울라고 하잖혀요. 물새도 울고~ 낙화암 그늘 아래 울라~고 허는디 울어야지요."
술맛 떨어진다고 말하는 사람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어머니는 놀이판에 꼭 나를 달고 다녔다.
차마 어린 나를 집에 두고 갈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떼를 쓰면서 악착같이 따라갔기 때문이다. 엄마들 놀이에 따라간 아이는 나 혼자뿐이다. 돌쟁이까지 매정하게 떼어놓고 오는 놀이판에, 어머니는 나를 옆구리에 혹처럼 달고 여기저기 다니셨다. 주로 친척들과 이웃들의 혼인식에서나 입으시던 때깔 좋은 한복으로 갈아입고, 동백기름으로 머리카락을 다듬어 비녀로 쪽을 지어 꽃놀이 채비를 하시는 어머니는늘 봐왔던 흙투성이의 어머니가 아니셨다.
"쯧쯧... 저 크다 큰 것은 또 지에미를 따라왔네. 야, 이 기집애야~네 에미 좀 편하게 냅두면 안 되냐?"
엄마 치맛자락에 붙어 있는 나를 보고 사나운 옆집 순창댁이 쥐어박을 듯 화를 냈다. 나는 무서워서 어머니 치맛자락 속으로 몸을 숨겼다. 어머니의 하늘한 속치마 자락에서 분냄새 같기도 하고, 나프탈렌 냄새 같은 강한 향이 맡아졌다.삼례 마그네 다리에서 복달임을 하러 갔을 때에, 미역국에 말아준 열무김치 맛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어머니는 눈치껏 나를 먹였고, 난 아기 참새처럼 따복따복 잘 받아먹었다. 막걸리만 빼고 다 먹은 것 같다.
'퐁당퐁당, ' '산토끼'를 부를 때 나는 꿈꾸는 백마강을 열심히 외워두었다. 어머니가 밭을 매는 도중에 흥얼거리다가 가사가 떠오르지 않아서 멈칫하면
"엄니, 저어라~사공아~잖여."
어머니는 이런 나를 신통방통한 얼굴로 바라보며 크게 웃어주셨다.
"아니, 우리 막뚱이가 언제 어른 노래를 외왔디야. 참 똑똑허네. 네가 한번 다 불러봐라."
그러면 나는 신이 나서 동요처럼 노래를 불렀다. 친척들이 방문하여 두새두새 이야기를 나누다가 말이 끊기면 어머니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어김없이 나를 불러 세웠다
"우리 막뚱이가 노래를 엄청 잘 부른당게요. 아가, 여그서 노래 한번 불러 보아라!"
'내 자식 공부 잘한다는 말'은 자랑하고 싶어도 차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서, 어머니가 궁여지책으로 나를 추켜 세우느라 노래를 시키면 나는 어린 맘에 좋다고 노래를 불렀다. 노래값 용돈을 받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진 후유증으로 치매에 걸리셨다. 긴 병원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는 거꾸로 내가 먼저 요청했다.
"엄니, 막내가 노래 한 자리 불러드릴까?"
옆 환자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불러주면
내가 딸인지, 누군지도 모르는 인사불성의 어머니가 희미하게 웃으셨다. 그리고 내 손을 꽉 쥐었다.
'네가 내 딸이구나. 우리 막내가 이 노래는 잘 부르지.'
어머니는 마그네다리 아래에서의 그날들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내 노래를 들으시고는 가느다란 눈물을 흘리셨다. 정신은 혼미해도 그 노래는 생생한듯했다. 아직 어머니가 온전히 살아있다는 강렬한 표현이기도 했다.
노래를 부르며 우는 건 우리 집안 내력인 것 같다. 아부지는 '사나이 우는 마음(갈대의 순정)'을 부르며 우셨고, 어머니는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꿈꾸는 백마강)' 부르며 우셨다.
나는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를 들으며 울고, '내 오늘은 울지만 다시는 울지 않겠다(Q)'를부르며 운다.
누군가 그리운 사람이 '어디에서 만나면 좋을까요? 물어본다면,
나는 두말없이 백마강 달밤 아래에서 기다린다고 말할 것이다.
그가 달밤에 백마강을 찾아왔다치고 '그럼 뭐 할 건데요'?라고 다시 묻는다면 나는 또 말할 것이다.
'실컷 울어나 봅시다'라고.
그가 또, '백마강 달밤 아래에서 왜 우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또 말할 것이다.
'아, 노래가 울라고 하잖아요.'
내 어머니 흉내를 낼 것이다. 담벼락을 짚으며 우시던 아버지를 흉내 낼 것이다.
패망한 나라의 도읍지 부소산성. 삼천궁녀가 흰꽃으로 떨어지던 낙화암 아래에서 처자식을 자기 손으로 죽일 수밖에 없었던 계백장군의 고뇌를 위로하고, 수장된 白馬를 위로하며, 궁녀를 위로하며, 무명의 백제인들을 위해 고시레 술을 부으며 실컷 울어나 보자.
아참, 장부로 태어나 왕노릇도 해보고 삼천궁녀랑 놀아도보고, 나라까지 시원하게 말아먹으며 할 것 다 해본 저 백제왕에게도 남은 술을 다 따라서 부어주자. 술이 바닥나면 그때, 너와 나의 이야기를 나누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