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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도 나도 차갑게 변했다.

나는 따듯했던 세상이 그립다.

by RoyaltyProgram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유기적으로 연결되기도 한순간에 두절되기도 한다. 이걸 잘 관리하는 게 비즈니스의 핵심이기도 하다. 학교를 다녀본 사람은 다들 만남과 이별의 순간을 경험한다. 나는 초등학교 친구들을 각별히 생각했었던 경험이 있다.


하지만 정작 요즘 교류를 이어가는 친구는 사실상 없는 것 같다.


나의 어릴 적을 생각해 보면 참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누군가 놀이에 끼지 못하면 끼워주기 위해 노력했다.

누군가 한 명 소외되는 모습을 보는 게 참 불편하고 안타까웠다. 그래서 난 늘 함께 하자고 말했었다.

이런 나의 행동들이 한 해가 지난 후를 힘들게 하곤 했다. 난 학년이 종료되는 날이나 졸업식에 유독 힘들어했다. 그동안 함께 했던 친구들과의 교류가 끊기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던 것 같다.


여러 번의 이별 아닌 이별을 경험하며 사실 덤덤해졌다. 참 애석한 점이다. 주변 사람들을 모두 돕고 다니지는 않으니 덜 피곤하기도 하지만 인류애가 많이 상실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난 몇 년 사이에 차가운 사람으로 변한 것 같다. 이게 나의 탓만은 아닌 것 같다.


세상이 차갑게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적어도 분명한 것은 어릴 적 내가 알던 세상은 아니다.

'의리'라는 개념은 '알빠노'라는 단어로 사라졌고, 누군가의 공익적 행동에 '고마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이 사라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경쟁의 연속에서 살고 있고 한국의 아파트값을 보면 많은 성인들이 돈에 쫓기듯 살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세상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세상이 차갑게 변화한 이유를 생각해 봤다.



첫째, 어린아이들의 세계는 현실과 다르다.


세상이 불구덩이여도 어린아이들에게는 좋은 것만 보여주는 것이 관례적이다.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일정 나이까지 '돈'이라는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개념도 몰랐고, 부모님이 왜 직장을 다니시는지 또 친구가 왜 이사, 전학을 가는지 몰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모님이 내게 좋은 것들만 보여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셨던 것 같다. 난 따듯하게 데워진 안대를 끼고 세상이 유토피아인 줄만 알았다. 나뿐 아니라 많은 친구들이 그랬던 것 같다. 지나고 보니 세상은 그것보다 훨씬 각박했고, 어릴 적 순수한 마음과 에너지는 불안과 답답함으로 승화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과 다른 현실을 보기 시작하며 변해간다.




둘째, 숏폼의 엄청난 확산.


나의 어린 시절까지만 해도 숏폼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중학교 때 이제 막 틱톡이 처음 알려지기 시작했던 걸로 기억한다.


숏폼이 세상에 미친 영향은 굉장하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한다. 1시간만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봐도 중독이라고 생각했던 그때와 달리 이제는 성인, 아이 관계없이 다 같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숏폼만 내리고 있다. 난 숏폼에 거부감을 크게 느끼는 사람이다. 일부러 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세상은 숏폼이 지배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대면했을 때 많은 이들이 자연스레 숏폼을 내리고 있다. 이제는 같은 공간에 있어도 우리는 서로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사라졌다.


어쩌면 지금 세대의 친구들은 누군가를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눈다는 게 어색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대화의 단절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보는 숏폼은 짧은 시간에 큰 도파민을 만들어야 하는 콘텐츠다. 그렇다 보니 숏폼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더 이상 지루함을 견디고 오랜 시간 무언가를 하는 것을 굉장히 어려워한다. 여기서 '오랜 시간'은 사실 한두 달의 긴 기간도 아니다. 예전 유튜브 평균 영상 길이인 10분 정도만 봐도 그렇다. 이제는 유튜브 롱폼 동영상의 평균 길이도 10분이 되면 끝까지 보는 사람의 수가 급격히 적어졌다. 10분 정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이 되었다. 이런 현실에서 세상이 차갑게 변하는 것은 사실상 당연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셋째, 입시의 경쟁 시대.


우리는 흔히 혐오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별거 아닌 내용의 콘텐츠를 SNS에 올려도 누군가는 이를 비판한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비판이 남발되는 것이 내가 정의하는 혐오의 시대이다. 무엇이 사람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개인적인 생각에 따르면 이는 우리가 태어나 본격적인 경쟁을 처음 접하게 되는 대입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최근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목동, 대치동의 대부분의 아이들은 7살에 학원 '뺑뺑이'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사교육이 의미 없다는 주장에 난 동의하지 않는다. 당장 우리 학교만 봐도 전교 20등까지 목동, 대치, 일상 등등의 학군지 출신 학생들만이 자리 잡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학원 뺑뺑이를 돌아도 누군가는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경쟁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되든 안 되든 학원에 가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사실 학원만이 문제가 아니다. 수는 판에서 N 수 생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고 현역으로 대학교를 가는 사람들의 비중이 크게 줄었다. 즉 고등학교 내에서 경쟁에서는 당연하게 이겨야만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 고등학교 친구들을 여유 있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한지 나는 의문이다. 많은 아이들의 내면에는 친구들을 잠재적 경쟁자로 인식하는 것을 난 정말 많이 보아왔다. 특히나 이건 잘 안될 때일수록 더욱 그렇다. 난 안되는데 누군가는 잘되면 나랑 같은 처지처럼 느껴질 수 없다. 당장 옆에 있는 누군가보다 1점이라도 더 높은 점수를 받아야만 하는 현실에서 조급함은 당연하다. 학교는 대부분의 첫 사회생활 경험이다. 고교 교육이 바로잡히지 못하면 세상은 더욱 빠르게 차가워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교육은 나아질 기미가 잘 보이지 않는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임을 알지만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이다. 나는 지금이 대한민국이 진심으로 우려스럽다.




넷째, 우리 인류는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다.


첫째부터 셋째의 상황에 본인은 해당하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간과하는 것이 우리 인류가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라는 것이다. 산에 들어가 혼자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 이상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끝없이 영향을 받고 또 준다. 나 또한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내 삶에서 변한 것은 그리 많지 않은데 주변이 많이 변했다. 네트워크의 영향을 해결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아닌 것 같은 사람은 빠르게 단절하고 주위에는 나와 좋은 영향을 교류할 사람만 남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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