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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생을 가상현실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면?

로버트 노직의 '경험기계 사고실험'이 말해주는 것

"나는 이 스테이크 조각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아. 이 조각을 입안에 넣으면, 매트릭스가 나의 뇌에 전기 자극을 가해서 스테이크가 육즙이 넘치고 맛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잘 안단 말이야." (영화 『매트릭스』 중에서)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한 사람의 삶에서 모든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잘라내고 즐거운 경험들만 이어 붙이면 완벽하게 ‘좋은 삶’을 얻을 수 있을까? 만약에 ‘좋은 삶’이라는 것이 단순히 즐거운 경험들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라면, 이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논증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방법은 ‘쾌락의 경험’을 제외한 모든 삶의 요소들을 삭제해 버리고도 과연 바람직한 삶이 산출되는지 상상해 보는 것이다. 정치철학자 로버트 노직이 『Anarchy, State, and Utopia』에서 제시한 ‘경험 기계(experience machine) 사고실험’은 이러한 논증 방식을 택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이 가상현실 기계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평생 동안 ‘행복한 경험’들만 누리고 있는 A라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는 ‘쾌락을 경험하는 자아’ 외에는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는, 일종의 유토피아적인 ‘매트릭스’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다. A는 ‘잘’ 살고 있는 것일까? 


   또 A의 ‘삶의 만족도’가 누구보다도 높다는 뇌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근거로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평생 기계 안에서만 살 것을 독려한다고 가정하자. 사람들은 경험 기계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까? 국가는 강제력까지 동원하여 사람들을 기계에 접속시키고 사회 전체의 행복을 극대화해야 하는가?



   삶이 수많은 ‘경험’들의 산술적인 총합일 뿐이라면, 경험 기계에 접속하는 것은 언제나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다. 경험 기계는 사용자의 쾌락을 극대화하는 (또는 서비스 시작 시점에 사용자가 원하고 있었던) 경험들만으로 일생의 매 순간을 채워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뇌에 전극이 꽂힌 채 경험기계 속에서 평생을 살아간다는 생각에 거부감을 느낀다. 국가가 경험 기계 사용을 강요하기까지 한다면 반감은 더더욱 증폭될 것이다. 이러한 거부감의 원인은 무엇일까?


   아마도 답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파편화된 경험들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적인 ‘이야기’로 바라본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인간은 삶을 수동적으로 체험하는 것을 넘어, ‘삶의 저자(author of life)’로서 자신만의 인생 서사를 직접 집필하고자 하는 존재이다.


   ‘삶의 저자’는 자기 존재의 의미에 관하여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능동적으로 탐색해나가는 주체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이 세계에 어떤 고유한 빛깔을 더하고 있으며, 나와 다른 빛깔의 사람들과는 어떤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저자 자신의 답변은 그의 인생 서사의 가장 근원적인 ‘주제’, 즉 삶의 근본 계획과 가치관을 형성한다. 그리고 매 순간의 경험은 언제나 부분적으로라도 서사의 근본 주제 및 과거에 작성되어 온 페이지들을 기반으로 구성되고 해석된다. 행위자가 ‘삶의 저자’로서 선택하는 행위들은 “내 전체 인생 서사에 비추어 보았을 때, 무엇이 가장 나다운 선택일까?”에 대한 명시적 또는 암묵적 이해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개개인의 고유한 정체성 서사와 분리된 기계 속의 경험들은 즐거움을 줄 수는 있을망정 삶에 진정한 의미를 더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야기의 맥락(나는 누구이며, 타인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왔는가)과 무관하게 설계된 경험들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변호사로 근무하던 사람이 (과거의 기억을 잃은 채) 기계 속에서 미국의 유명 가수로 이름을 날린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태어났던 사람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경험기계 속의 사람이 자신의 실존을 회복하는 시점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실제 죽음의 순간일 것이다.


   물론 사용자가 기계 접속 이전에 작성해 온 삶의 서사가 기억의 형태로 남아있도록 경험들을 설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피겨스케이팅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품고 열심히 훈련해왔던 아이의 경우 기계 속에서 훈련을 이어가고 제2의 김연아 선수로 거듭나는 경험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설계된 경험들도 몇 가지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닌다.


   첫째, 기계 속에서는 ‘실재하는 세계’와 상호작용을 할 수 없다.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고통의 부재’이다. 고통은 세계에 대한 반응이다. 경험기계 속에서 사람들이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이 실질적으로는 세계와 어떠한 관계도 맺고 있지 않음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사실 태어날 때부터 기계 속에서 자라나지 않은 이상, 고통이 없는 세계를 어떻게 실제라고 착각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삶의 저자가 의미 있게 생각하는 것은 세계가 주는 ‘느낌’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이다. 가령 우정과 사랑의 관계에서 ‘나’에게 소중한 것은 상대방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이지 그가 유발하는 호르몬의 화학작용이나 뉴런의 연쇄적인 반응이 아니다. 또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은 사람에게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켰다는 ‘느낌’이 실제 ‘변화의 흔적’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다. 바깥세상은 여전히 전쟁으로 신음하고 있는데, 기계 안에서 '노벨 평화상 받기' 체험을 한다고 세계 평화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둘째, 미리 설계된 기계 속의 생활은 삶의 저자가 마땅히 누려야 할 ‘열린 결말의 자유를 훼손한다. 기계에 종속되기 이전의 ‘자유인’은 자신의 정체성 서사에 대한 최종적인 편집 과정을 끊임없이 유예할 수 있다. 즉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의 답변은 언제나 변화에 열려있고,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반면 기계 속의 ‘나’는 더 이상 무한한 변화의 가능성을 지닌 ‘미래의 나’를 기대할 수 없다. 아니, 또 다른 ‘미래의 나’가 존재할 수도 있었다는 가능성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충분히 다른 모습을 띨 수도 있었던 ‘미래의 나’는 경험을 설계할 당시 ‘현재의 나’가 좋아하고 원했던 삶의 모습으로 화석화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유치원생일 때 경험기계의 내용을 설정해 버린 사람은 남은 인생 동안 어린아이들이 즐길만한 취미 생활을 영위할 뿐, 타인의 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성숙한 삶의 태도나 인류 역사의 위대한 지성들이 남긴 지식과 통찰들을 배우지 못할 것이다. 이 세계의 광활함과 ‘나’ 자신이 지닌 잠재력을 온전히 확인하지 못하고 삶을 마감하는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닐까?


   결국 우리는 경험기계에서 평생을 보내지 않을 이유들을 살펴봄으로써 좋은 삶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를 도모할 수 있다. ‘좋은 삶’은 수많은 쾌락의 경험들을 잘라내서 이어 붙인다고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삶’은 각 개인이 세계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형성해 나가는 자신만의 서사이자 가치관이다.



(관련 글) 팔은 안팎으로 굽어야 한다 (brunch.co.kr)


이미지 출처: https://iep.utm.edu/experience-mach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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