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팔은 안팎으로 굽어야 한다

영화 『대부』가 묘사하는 가족애는 과연 '사랑'인가?

사랑의 뿌리가 되는 윤리적 사유에 관하여


https://www.imdb.com/title/tt0068646/?ref_=fn_al_tt_1


   마피아의 삶을 그린 영화 『대부(The Godfather)』에는 자신의 가족을 무척이나 사랑하지만, ‘자기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잔인한 고문과 살인을 서슴지 않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타자(the other)’를 향한 마피아의 잔혹함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경악하게 만들지만, 영화 속 주인공들은 그 모든 피흘림이 가족을 지키기 위한 ‘숭고한 사랑’이었다고 믿는다.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그들의 이기적인 가족애가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의 문제이다.


   사랑을 오로지 ‘감정’이라고만 이해한다면, 비록 마피아들의 범죄 행위가 지나치기는 지만 가족에 대한 사랑만큼은 진실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도를 넘어서 ‘타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약화된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받아들인다면, 사랑의 실천은 ‘가까운 사람에 대한 편애’와 ‘인류를 보편적으로 존중하는 마음’ 사이에서 적절한 비율을 찾는 문제가 되어버린다. 즉 ‘편애’와 ‘초월적 인류애’라는 두 가지 상이한 도덕 감정을 어떻게 조화시킬지를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충성심과 인간 일반에 대한 의무를 이분법적으로 이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관점으로는 무엇이 ‘건강하지 않은 편애’인지에 대해 모두가 납득할 만한 판단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보다 나은 대안은 ‘가까운 사람들을 향한 바람직한 사랑’이 ‘모든 인간을 존엄한 존재로 여기는 마음’과 동일한 당위적 요청에 의해 도출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 당위적 요청은 모든 인간이 자기 삶의 저자(author)이자 주인공(protagonist)이라는 점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들 각자가 써 내려가는 유일무이한 인생 서사를 ‘자유’의 산물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가까운 사람에 대한 헌신이 가치 있는 것은 그것이 모든인간의 고유한 실존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의무의 구체적이고 탁월한 발현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기술』의 저자 에리히 프롬이 서술했듯이,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 모든 인간의 평등함을 일깨울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생동감과 진실성을 얻는다.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삶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저자이면서, 그 주인공이다


   『대부』 속 마피아 조직원들이 보여준 모습이 사랑의 한 가지 형태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들은 분명 자신들의 가족에 대해 강렬한 사랑의 ‘감정’을 느꼈고, 이는 폄하할 만한 일은 아니다. 다만 그들은 인간이 윤리적 주체로서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온전한 사랑을 행하지는 못했다.


   진정한 사랑을 아는 사람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뿐만 아니라 ‘타자’까지도 사랑할 수 있다. 아니,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도 궁극적으로는 ‘타자’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한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그 사람 자신뿐이며, 사랑은 정체성 서사를 써 내려가는 저자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태도 위에서만 견고하게 구축되기 때문이다 (김현경, pp.214-215 참조). 아무리 친밀한 관계이더라도 ‘나’라는 존재는 결코 타인의 인생 서사를 좌지우지할 위치에 있지 않다.


   가장 온전한 의미의 사랑이란, 내가 내 삶의 저자인 것처럼 다른 모든 사람 또한 자기 삶의 저자임을 존중하는 것이다. 또 내가 내 삶의 주인공인 것처럼 다른 모든 사람 또한 자기 삶의 주인공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나와의 거리가 가깝든 멀든, 모든 삶의 이야기에는 저마다 고유한 경로와 목적지가 있기에 가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대부』 속 인물들이 보이는 사랑의 ‘감정’은 이러한 윤리적 층위를 결여하고 있다. 오히려 이기적인 자아가 가족집단에게 투영된 면이 강하다. 가령 '소니'라는 인물은 자신의 여동생이 남편에게 폭행당했다는 것에 분노하면서 매제에게 처참한 복수를 행한다. 하지만 이렇게 ‘소중한’ 여성들이 정작 집안의 남성들에게 평등한 주체로서 현상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다만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이는 영화 속 남성 주인공들이 자신의 명예 내지 소유물들을 지키는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집안의 여성들을 보호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자녀를 자율적인 인격으로 존중하기보다는 자신의 욕망 실현을 위한 수단인 것처럼 대하는 부모님들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부모님들일수록 남의 자식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자기 자식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자식 사랑’을 드러낸다. 나와는 ‘다른’ 존재를 품을 줄 아는 사랑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고, 오직 나와 동일시될 수 있는 이에 대한 집착과 나와 동일시될 수 없는 이에 대한 적대감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기적인 부모님이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자녀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적인 주체임을 깨닫게 된다. 그 깨달음 후에도 자녀의 존재 자체를 기뻐할 수 있기에 부모님의 사랑은 숭고한 것이다. 그리고 자녀를 자아의 일부라고 느끼는 정도가 줄어들수록 눈을 돌려 ‘타자’들도 그들의 부모님에게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결국 가까운 사람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일반적인 타자를 존엄한 존재로 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반면 건강하지 않은 편애는 온전한 사랑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형태의 이기심에 불과할 것이다.





<참고문헌>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19.

매거진의 이전글 '개량되는' 것과 '성장하는' 것의 차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