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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기를(1)

『더 헌트』와 『피고인』으로 보는 집단의 폭력성과 사법적 정의

영화 『더 헌트(Jagten)』 줄거리

이혼 후, 고향으로 내려온 유치원 교사 루카스는 새로운 여자친구를 사귀며 아들 마커스와 함께 하는 행복한 삶을 꿈꾸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루카스를 둘러 싼 한 소녀의 사소한 거짓말이 전염병처럼 마을로 퍼지고,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루카스는 마을 사람들의 불신과 집단적 폭력 속에서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한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다.

출처: 더 헌트 (The Hunt) 상세정보 | 씨네21 (cine21.com)


영화 『피고인(The Accused)』줄거리

남자친구와 다투고 술집에 갔다가 세 명의 남자에게 강간을 당한 사라. 그러나 가해자들은 사라가 유도한 것이라며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결국 사라는 자신의 억울함을 벗기 위해 법정투쟁을 시작하는데...

출처: 피고인 (The Accused) 상세정보 | 씨네21 (cine21.com)



들어가며


   영화 『더 헌트(Jagten)』와 『피고인(The Accused)』은 법정에서 전혀 다른 위치에 서야만 했던 이들의 이야기이다. 전자는 성범죄 사건의 피의자로 지목되었던 이의 이야기이고, 후자는 성범죄 사건의 피해자였던 이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두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같은 상황에 놓였던 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집단의 맹목적인 폭력에 의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가 박탈되었던 이들의 이야기이며, 공적 정의의 부재 속에서 사적 복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인권침해의 현실 속에서 법규범에 의한 보호를 절박하게 필요로 했던 이들의 이야기이다.


   본 글은 ‘개인을 향해 가해지는 집단의 폭력과 이에 대한 법적 차원의 해결책’이라는 관점에서 『더 헌트』와 『피고인』을 비교 분석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희생양 메커니즘(Scapegoat Mechanism)’ 이론을 분석의 틀로 동원할 것이다.



개인을 향한 집단의 ‘만장일치적' 폭력: '신화'와 '희생양 메커니즘'의 문제


   르네 지라르는 인간 사회가 역사적으로 혼란과 위기에 빠질 때마다 질서를 재창출해내기 위해 ‘희생양 메커니즘’에 의존해왔음을 주장한 바 있다. 그가 말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이란 “폭력적 성향의 집단적 전이현상으로서, 공동체가 환난으로 인하여 와해될 위기에 처하게 될 때, 이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힘없는 개인이나 소수 집단에게 폭력을 쏟아 부어 공동체 내부의 긴장과 불만을 해결하는 방식(이종원, p.9)”을 의미한다. 위기의 원인 제공자를 지목한 후 그에게 ‘만장일치적 폭력’을 가함으로써 집단적 동요를 가라앉힌다는 것인데(Girard, p.41 참조), 지라르는 이 메커니즘이 인류 역사 속에서 가장 보편적인 질서 생성 원리라고 보았다. 즉 상당수의 인간 사회가 위기의 순간 약자 소수자 희생제물로 삼아 사회 안정을 회복하는 일종의 ‘전체주의’ 사회였다고 본 것이다.


   공동체 위기의 원인으로 지목된 희생양이 실제로 주된 원인 제공자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희생양이 무고하다는 진실이 있는 그대로 인식될 때 희생양 메커니즘은 온전히 작동하기 어려우며, 공동체는 계속해서 불안과 갈등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김모세, p.204 참조). 이에 폭력의 가담자들은 모든 위기의 책임이 실제로, 전적으로 폭력의 대상이 되는 희생물에게 있다고 믿어야만 한다(김모세, p.216 참조).


   지라르의 이론에 따르면, 이러한 믿음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바로 ‘신화적’ 해석 작용이다. 즉 무고한 사람에게 집중된 폭력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희생양에 대한 ‘신화적’ 해석이 덧입혀지며, 전체주의적인 폭력에 불과한 것이 집단의 서사에 의해 ‘정당하고 정의로운’ 것으로 탈바꿈한다.


   지라르가 소개하는 한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의 생애』라는 1세기 기록에는 아폴로니우스라는 영적 지도자가 에페소스에 퍼져 있던 페스트를 기적적으로 치유했다는 일화가 등장하는데, 지라르는 해당 이야기가 희생양 메커니즘을 은폐하는 전형적인 박해의 텍스트라고 평가한다.


  영적 지도자였던 아폴로니우스는 이 잔인한 역병을 치유하겠다고 공언하면서, 사람들을 이끌고 극장 근처의 한 거지 앞으로 다가갔다. 거지 주위에 둘러서 있는 에페소스 사람들에게 아폴로니우스가 이렇게 말했다. “돌을 들어 모든 신들의 적인 저 녀석에게 던지시오.” 

   아무 영문도 모르던 사람들은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거지는 자신들에게 자선을 간청하는, 애처로운 사람에 불과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폴로니우스는 뜻을 굽히지 않고 거지에게 돌을 던지라고 그들을 몰아붙였다. 이에 몇 사람이 먼저 거지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하자 그때까지 장님처럼 눈을 깜박거리기만 하던 그 거지가 갑자기 이글거리는 두 눈으로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그제야 에페소스 사람들은 그 거지가 실은 악마라는 것을 알아채고 자발적으로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돌을 던졌던지 거지 시체 주변에 커다란 돌무더기가 만들어질 정도였다. 

   잠시 뒤 아폴로니우스는 돌무더기를 헤치고 그들이 죽인 것을 확인시켰다. 돌을 들어내자 그들은 그 시체가 거지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자리에는 몰로스 개와 닮은, 그러나 어미 사자만큼이나 커다란 짐승(악마) 하나가 있었다. [.....] 이 사건을 계기로 페스트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게 되었다. (Girard, pp.69-70)


   신화텍스트는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했던 악마의 존재가 아폴로니우스의 기적을 통해 드러났다고 주장한다(김모세, p.286 참조). 하지만 진실은 오히려 거지를 악마로 몰기 이전까지의 상황에서 드러난다. 사람들이 “차마 돌을 들어 던지지 못한 만큼 연민을 느끼게 하는(김모세, p.286)” 거지는 스스로를 보호할 힘조차 없는 약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전염병으로 인해 무너진 사회적 질서와 화합을 회복하기 위해서 아폴로니우스는 이 한 사람에게 군중 전체의 혐오 감정과 폭력을 집중시킨다. 그리고 이 사건을 해석한 신화텍스트는 희생양이 실제로 악마였다고 서술함으로써 군중의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해준다. 희생양 메커니즘, 즉 무고한 사람도 악마라고 믿게 만드는 집단적인 자기기만이 ‘신화적 해석 작용’ 속에서 영속화된 것이다.



(다음글에 이어서)




<참고문헌>

이종원, 『희생양과 호모 사케르』, 대구: 계명대학교 출판부, 2020.

Girard, Rene,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김진식 옮김, 서울: 문학과지성사, 2019.

김모세, 『르네 지라르-욕망, 폭력, 구원의 인류학』, 파주: 살림,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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