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째도 살아갑니다-4
“빨리 컨펌을 받아야 일을 할 거 아니야!” 사무실에 처절히 울리는 상사의 말에 결심했다.
지금은 국회 최고, 최대의 이벤트. 사장과 직원의 4년을 결정하는 순간이자, 정당의 힘이 결정되는 순간. 국회의원 선거 기간이다.
원래라면 나도 “확인해주세요!”, “슬로건이 나와야 일을 하지요!”라며 상사의 비명에 화음을 넣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창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듯 관조적이다. 하필 참 안 좋은 시기에, 안 좋은 병이 도진 탓이다. 이따금 죽음을 생각하는 시기, ‘나는 왜 살아있는가’를 묻는 시기. ‘살아 있는 것’과 ‘사라지는 것’의 손익을 따지는 시기. 그렇다. 나는 일명 ‘노잼병’에 걸렸다.
‘나는 왜 여태 살아 있는 것인가’ 처음 그 생각을 진지하게 한 것은 성인이 다 된 후였다. 사춘기 때 한번쯤 해볼 법한 생각이었지만, 앞선 글에 말했듯 나는 사춘기가 더럽게 늦게 왔다. 인생의 의미를 고민하기에도 진지하지 않았다. 지독한 가난을 통과하고, 그 와중에 (편의상)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꿈을 잃고 당장 내일을 걱정해야 하는 시기에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의 존재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사는 것이었다. 좋던 나쁘던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았다. 주어진 수명만큼 살다 가면 된다는 당연한 인식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죽음을 떠올린 것은, 왜 내가 살아 있어야 하는가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한 것은, 사춘기를 옛날 옛적에 통과한 20대 후반, 침착하디 침착한 마음을 유지하던 어느 날이었다.
과거 총선을 앞두고 장관직으로 간 사장님 덕에, 나는 선거캠프 대신 부처에 갔고 일 년 후 장관 임기와 함께 면직되었다. 직후 이어지는 보궐선거와 대선을 끝마쳤다. 그 기간이 약 2년이었다. 그 말인즉슨, 약 2년간 제대로 된 수입과 직업 없이, 불확실성을 껴안은 채 살아온 것이다.
대선이 끝나고 나를 불러주는 사람은 없었다. 한때 밤을 새우며 치열히 일했던 나날이 휴지조각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쉽게 인정할 수는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 달려온 2년은 나 좋은 일이 아니라 남 좋은 일이었고, 나는 지금 끈 떨어진 연이 되었다는 것을. 지금까지 열심히 쌓아 올린 것은 사실 파도 앞의 모래성이었다는 것을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나의 20대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리 이력서를 넣어도 전화기 한번 울리지 않던 보통날이었다. 이번에도 안 됐구나,라는 생각이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개운했다. 휴대폰을 열어도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 백수가 된 나를 짐으로 생각하지 않을 사람, 진심으로 내 전화를 반겨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공감받지 못할 우울감을 남과 나누고 싶지도 않았다. 베란다로 가서 하릴없이 담배를 폈다. 그날따라 해도 좋고, 바람도 연한 것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날씨였다. 흐흐 웃음이 나왔다. 역시 해는 뜨는구나, 내일도 해가 뜨겠구나. 나는 왜 살아야 하는 걸까.
살아봤자 돈만 든다. 당장의 월세를 낼 수는 있지만 얼마 가지 못할 것이다. 일 한지 5년이 넘었는데 통장 잔고는 0원에 가까워진다. 대구 본가로 갈까? 잠깐의 회피는 될지라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꽤 오랜 시간 즐겁게 고민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와, 사라져야 하는 이유를 비교했다. 결론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지도 않았다. 사는 것은 손익에 맞지 않다. 담배꽁초를 비벼 끄고 개운한 걸음으로 베란다를 나섰다. 당장 죽어도 되겠다. 어디서 어떻게 죽을까. 생각하며 말이다.
물론 실행에 옮기지 않았기에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한 가지 말해주자면 저 결심이 깊은 우울감의 말로라던가, 인생 회피의 개념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 후 나는 삶을 보는 태도가 달라졌다. 당장 죽어도 되는 삶, 미련이나 고통 없이 살자는 생각을 한 것이다. 만약 상황이 계속 안 좋아진다면? 죽지 뭐. 초탈한 태도가 날 자유롭게 했다. 그리고 아주 가끔, 내 상황이 좋아짐을 느낄 때 그 베란다의 결심을 떠올리며 이야, 살아있을 때 손익 분기가 좋아질 때도 온다. 하며 소박한 행복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따금 그때를 떠올린다. 죽음을 결심하기 직전의 순간 말이다. 나는 그날들을 평가절하하듯 ‘노잼병 시기’라 불렀다. 해가 들지 않는 값싼 월세방에서 누워 하릴없이 천장을 바라보던 시기. 우울감이 발끝부터 곰팡이처럼 들러붙던 시기. 잘 살지도, 그렇다고 죽지도 못했던 나를 떠올린다. 그때 나를 되살린 것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결심하는 것이었다.
그런 나에게 다시 노잼병 시기가 온 것이다. 대출금을 값아 잔고가 만 원 이하로 남았다. 집안 사정은 날이 갈수록 안 좋아진다. 업무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나를 의지하는 사람들의 기대가 너무도 무거워 폐가 터질 것 같았다. 할 일은 산적한데, 내가 감당할 사이즈인지 겁부터 났다. 책임은 미뤄지고, 미뤄져서 나에게 모였다. 덜컥 앞둔 선거에서 패배가 올까 두렵다. 패배해서, 다시 그 어두운 골방에 박히면 어떡하지? 아무도 날 찾지 않으면? 내가 쌓아온 모든 것들이 다 의미 없는 것이었다는 걸 다시 알게 되면?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마저 끊기면, 당장 아빠의 치아수술은 어떤 돈으로 해야 하지? 다시 대출을 해야 하나? 또 빚을 져야 하나? 한동안 우울한 시기를 보냈다. 가만히 앉아 멍을 때리거나, 혼자 우는 시간이 늘었다. 글도 쓰지 않고 책도 읽지 않는 몇 주를 보냈다.
그리고 오늘, “컨펌을 받아야 일을 하지!”라는 상사의 외침에 불현듯 죽음을 생각했다. 그래, 죽지 뭐. 명쾌한 깨달음이었다. 회사에 치이건, 선거에서 지건, 백수가 되어 골방에 처박힌 건, 다른 사람이 광을 팔며 치적을 과시하건, 아빠 치아가 모두 빠지건, 못 버티겠으면 미련 없이 죽지 뭐. 그게 무슨 상관이냐. 싶은 것이다.
그러니 또다시 마음이 개운해졌다. 그 무슨 일이건 나의 죽음 앞에선 하찮기 때문이다. 두 번째 죽음을 결심하는 오늘, 우중충하던 해도 환해 보이고, 옹기종기 움직이는 자동차도 귀엽게만 느껴진다. 사무실 밖을 나가면 모든 풍경이 즐겁겠지. 아, 나는 자유롭구나. 자유 속에서 행복하구나. 이제 다시 일을 해야겠다. 대출을 받고, 갚아야겠다. 내일도 뜨는 해를 기뻐해야겠다. 와닿은 죽음을 만지며, 살아있음을 느껴야겠다. 상사가 드디어 컨펌을 받았나 보다. 목소리가 좋아졌다. 이렇게 다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