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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비누나 Jan 08. 2024

33살, 연봉 1억 1천₩, 여전히 가난하다

과메기를 바로 사 먹을 수 있는 그대가 부럽습니다, 미국 동포가 올림

2008년, 지금으로 부터 무려 16년 전 처음 미국 땅을 밟았다. 16년이라니... 내가 이민 생활을 16년이나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방금 계산기로 다시 두드려봤다. 가족 이민을 오거나 부모님을 따라 오게된 이민 1.5세라면 자신의 인생이 새로운 나라에서 시작할 것이고, 그게 오래 될 거라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오겠지만 나는 애초부터 미국에 오래있을지 예상하지도 못했고, 그렇다해도 지금 33살의 내 미국 생활을 상상한 건 아니기 때문에 항상 놀랍다. 처음 미국에 오게 된건, 딱히 내가 원대한 계획이 있거나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싶어서 그런건 아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같은 반 친한 친구가 신문에서 '미국 국립 교환학생 모집'이라는 광고를 봤다며 창원에 같이 시험을 치러가자는 이야기가 시발점이 되었다. 당시 그 친구는 나와 초등학교부터 같이 다녔던 믿을만한 아이였고, 항상 매사에 의욕있게 열심히 하는 반장 스타일 성격 소유자였다. 그 친구는 태생이 애교스러운건지, 밉지 않게 항상 웃으며 질풍노도 시기의 나의 예민한 성격도 항상 헤헤호호 웃으며 잘 받아주던 귀여운 친구였다. 꾸밈 없이 귀엽고 밝은 성격의 친구가 좋았던 나는 툴툴 거리면서도 같이 공부했고, 둘 다 어느정도 상위권 학생이었기 때문에 서로에게 좋은 자극이 되어주곤 했다. 이 친구가 방학도 다가오고, 놀면 뭐하냐며 주말에 본인이 신문에서 본 시험을 같이 보러가자며 여러번 보채길래, 어쩔수 없이 넘어가는 척 그 친구 아버지의 승용차를 타고 비가 오는 토요일 오전 시험장으로 향했다. 


지금은 어쨌든 시카고


그날 도착한 시험장은 창원의 한 학교였고, 생각보다 많은 학생들이 미국 교환학생 시험을 치러오는걸 알았다. 당시엔 미국 유학 붐이 한창이었고, 당시 달러환율도 900원이었나 굉장히 저렴한 시기였기때문에 더욱 유학 광풍이 불었던 시절이다. 시험은 중학교 영어 시험과 별 다를바가 없었고 적당한 긴장감 속 OMR 카드 마킹을 제대로 했나 여러번 체크하며 시간이 흘렀다. 시험이 끝나고 나와 친구는 의례 정답이 뭐였는지, 헷갈렸던 시험 문제는 무엇이었는지, 약간의 흥분감과 결과를 기대하며 조잘거렸다. 친구의 아버지는 조용히 우리의 시끄러운 대화를 들으시며 고생했다며 일희일비 하지 말라는 말씀과 함께 롯데리아에서 햄버거 세트를 사주시고 나를 집 앞에 내려주셨다. 당시 우리집은 부모님이 맞벌이셨고, 가정 불화가 상당했기때문에 아버지와 롯데리아에서 햄버거를 먹는다는 건 정말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래서인지, 유독 그날의 기억이 자세히 남아있다. 영어 문제가 뭐였는진 기억나지 않지만, 비오는 토요일 오전 친구와 나의 가벼운 흥분감과 친구 아버지와 햄버거를 먹었던 묘하게 비현실적인 하루.


그러고 시험을 잊을때즈음, 교환학생 주최사에서 합격 학생들의 명단을 공지했다. 나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합격을 했고 친구는 떨어졌다. 나는 친구가 떨어진 사실이 더 쇼크였다. 정답지를 맞춰보니 한 두 문제 차이로 친구는 불합격을 했다. 괜시리 미안해졌지만, 그 친구는 "와하하 뭐야~!"라며 웃으며 나보고 맛있는 걸 사라면서 축하해줬다. 이후 생각지도 않게 합격했다는 소식에 갑자기 미국에 꼭 가고 싶어졌다. 한국에서 학교 다니는게 힘들었고, 맨날 똑같은 이야기나 하는 친구들이 지루했고, 뭔가 새로운 나라에 가면 '멋져 보이는 나'를 상상했다. 게다가 미국 국립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알아보니 생각보다 비용이 크게 들지 않고 나의 비행기표값, 용돈만 있으면 미국인 가정에서 무료로 거주하며 학교를 다닐수있다는 것 아닌가. 게다가 가정 불화가 심했던 집이어서 항상 탈출하고 싶었기에 부모님께 적극적으로 보내달라고 졸랐다.


지금은 어쨌든 패션 디자이너.


1남1녀의 집, 장남을 원했기에 아들을 한 명 더 놓아야 했다는 부모님의 스토리를 귀에 딱지듣고 자라온, 어릴때부터 꾸준히 차별을 받아온 K-장녀인 나는 "그래, 누나가 먼저 해봐야지! 모범을 보여야지!"라는 말과 함께 미국 행을 허락받았다. 12달 1년 용돈으로 한 달에 30만원씩, 한 400만원과 비행기 표까지 해서 600만원 정도를 들고 미국으로 날아갔다. 젊은 미국인 부부와 어린 아들과 함께 살게된 나의 첫 미국 생활은 그렇게 텍사스, 달라스에서 시작했다.


미국인 가족과는 영어 문제로 소통에 상당히 어려움이 있었고, 당시 32살-28살의 젊은 미국인 부부는 둘의 부부관계에 큰 문제가 있어 서로 굉장히 데면데면하게 1년을 보냈다. 다른 교환학생 친구들도 있었는데, 터키 친구의 말로는 밥을 안주거나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가족들에 비하면 나쁘지 않은것 아니냐고 했다. 실제로 이 미국 부부의 장인 장모 역시 독일에서 온 교환학생 여자애를 보살폈는데, 그 집에 비하면 나는 식사나 개인 방도 있고 편안했다. 헌데 밤마다 부부싸움이나 호스트 아주머니가 소리지르는 환경이라 다른 의미로 교환학생 생활 내내, 얼른 1년이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했다. 대부분 나는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고 영어가 서투른 고등학생이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건 선생님들이었다. 그 중에서 영어 선생님이셨던 안젤라 선생님은 자신의 방과 후 수업에 나를 데려가 수학이 부족한 미국 친구들을 도와주게 했고, 그걸 추천서로 써주시고 용돈도 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좋은 선생님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은 교장 선생님이 되셨더라.


어쨌든, 당시 나의 1년은 생각보다 별거아니게 지나갔지만 유일한 수확이 있다면 학교에서 대부분 공부만 했고 선생님들과 대화하며 영어가 부쩍 늘었다. 1년이 끝나고 내가 귀국하는 날, 호스트 아줌마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인사도 하지 않고 나를 보내셨는데 오히려 홀가분했다. 호스트 아저씨는 그게 미안했던지, 아줌마가 몸이 너무 안좋다고 연신 이야기하시며 나를 공항에 데려다주시고 사라졌다. 미국에서의 1년은 생각보다 별로였고, 텍사스가 싫었고, 내가 좀 더 좋은 곳으로 간다면 내가 꿈꾸는 재미있는 인생이 되지 않을까?라는 꿈을 꾸게 해주었다.


요새 듣는 대학교 수업 과제. 수준이 점점 낮아지는 현직 디자이너다.

그래서 내가 어릴때부터 좋아하던 인형 만들기나 옷 만들기에서 가장 멋져보이는 '패션 디자이너'를 내 꿈으로 삼고, 뉴욕의 패션 대학교에 지원했다. 인형 옷 만들기는 직업으로 삼기 어려울것 같으니, 대중적인 패션 디자이너를 꿈꿨고 혼자 열심히 포트폴리오를 준비해 뉴욕으로 왔다. 여기서도 꽤나 우여곡절이 많지만, 하나하나 나열하면 대서사가 될테니 차차 풀어나가겠다.


이렇게 시간은 지나고, 결론적으로 나는 지금 패션 업계에서 일을 하고 있다. 패션 디자이너도 해보았고, 지금 현재는 패션 테크니컬 디자이너라는 다소 생소한 직함으로 일하고 있다. 내가 꿈꾸던 멋진 삶과는 매우 동떨어져있고, 그냥 일개 회사원이다. 회사원+박봉+상당히 스트레스가 심한 3D 업종이랄까... 다들 직업을 들으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처럼 멋지고 화려할것 같지만, 실제는 섬유 먼지가 풀풀 흩날리고 매일매일 서로가 베끼고 베끼는 미국 캐주얼 의류 회사다. 뉴욕에서 이름 좀 알린다는 패션 디자이너들 밑에서도 일했지만, 그들이 이름날리는 것과 내 연봉은 반비례했다. 명품 브랜드에서 일하면 월급이 쎄고, 저렴한 브랜드에서 일하면 낮을거 같지만 정반대였다. 현실은 화려한 명품일수록 저렴한 연봉, 싸구려 옷을 대량파는 곳일수록 연봉이 쎘다. 일의 강도는 비슷했지만... 결국 현실 앞에 무릎 꿇었던 나는 내가 고등학교 시절 유명했던 한물간 패션 브랜드 아베크롬비 & 피치에서 시작해 지금은 대형 슈퍼마켓 체인 마이어라는 곳에서 일하고 있다.


2024년 1월이 되면 내가 작년에 연소득이 얼마였나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세금 정산서가 나온다. 작년에 나는 8만 4940달러, 반올림해서 8만 5천 달러를 벌었더라. 한화로 하면 약 1억 1천만 원 정도다. 2023년에 한 달 무급 휴가도 한국으로 다녀왔으니 1년 꽉 채워 일 했다면 조금 더 벌었겠지. 한국에서는 여전히 돈 좀 꽤 잘버는 직장인들의 기준이 1억인듯하다. 심리적 기준말이다. 근데 미국에선, 8만 5천 달러라고 하면 사실 좀 내세울만한 연봉은 아니다. IT나 연봉이 훨씬 높은 직군에서 8년차 디자이너라면 대다수가 보너스까지해서 100k, 10만 달러는 기본으로 번다. 나보다 연차 낮은 친구들도 더 버니까. 잘나가는 기업이라면 입 떡 벌어지는 150-300k까지 직원이 벌어가고, 상무나 이사가 된다면 몇 십억씩 받아가더라고. 나는 보너스니 뭐니 다 해서 8만 5천이니 주변을 둘러보면 내 연봉은 아주 낮지도 그렇다고 높지도 않은 수준이다. 가끔 미국인들은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서양인들은 이렇다라는 낭설이 자자한데 막상 '그사세(그들의 사는 세상)'에 들어오면 한국인들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진 않는다. 미국 속담 중에 옆 집 잔디가 항상 더 푸르다(Grass is greener on the other side)라는 말이 있겠는가. 친구들과 가끔 연봉 이야기를 하다보면, 왜 패션 디자이너를 하다가 공인중개사, 보험사, 보험 조절 전문가, 보안 IT 직원 등 다른 직업을 찾아가는지 이해가 가기도 한다.


연봉 1억 1천의 나는 어제도 가난했고, 오늘도 가난하다. 미국에서 월세 내고, 생활비 내고, 보험료 내고, 각종 공과금을 내고보면 잔고가 간당간당한다. 그래도 진짜 힘들면 이런 글을 쓸 수도 없었을거다. 아직까진 그래도 저금도 하고 연금도 넣고 미국 직장인들이 하는 것들은 다 열심히 채워 넣을 수 있다. 그리고 한인 마트에서 과메기가 팔지 않아, 요즘 미국에서 이틀만에 한국 음식을 배달해주는 식료품 사이트에서 냉동 포항 구룡포 과메기도 시켰다. 무려 꽁치 과메기로 300그람에 40달러나 한다. 5만원이 넘는 돈에 초장도 없고 배추도 안주지만, 이게 어딘가. 혼자 일요일 저녁에서 과메기를 먹으면서 이렇게 브런치에 원고료를 받지 않고 글을 쓰는 시간이 있는 나 정도면 가난해도, 꽤 괜찮을지도. 그래도 내일은 회사에서 컵라면이나 먹어야겠다. 과메기가 제철인 요즘같은 시절에 과메기를 바로 배달이나 쿠팡 시켜먹을 수 있는 당신이 나는 제일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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