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안전하고 행복해 보이는 동네 산 살바도르, 밤에도 산책 가능
올해의 마지막 출장, 12월 엘 살바도르 출장이 끝났다. 12월 첫 주 시카고는 한파에 영하 5도를 기록하는 날씨에 영상 17도의 온화한 날씨의 중남미로 떠나는 건 기쁨이자 즐거움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느끼는 거지만, 날씨가 내 컨디션에 주는 영향은 무시할 수가 없다. 특히 추운 날씨엔 날씨가 추워서 감기나 몸살이 오는 것보다, 조금만 흥분해서 땀을 냈다 하면 그 땀이 식는 과정에서 백발백중 감기에 든다. 게다가 회사에 출근하면 만성 기침에 감기를 달고 사는 애 엄마 아빠들 때문에 강제로 나도 감기에 옮는 게 일상이다. 그래서 추운 겨울 여러 겹의 겉옷을 껴입고 향하는 엘 살바도르 출장은 즐거움을 동반했다. 특히 이번 출장은 꼰대 회사에서 만난 몇 안 되는 가까운 동료이자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과 가는 출장이어서 마음이 한층 가벼웠다.
꼰대 회사에서 10개월 이상 버텼으니, 이젠 1년은 금방이라는 마음으로 매일매일 도 닦는 마음으로 회사를 출근하고 있다. 다녀본 미국 회사 중에 가장 엉망진창인 사내 시스템 속에 혼자 열심히 세팅하고 있으니 매일이 죽을 맛이다. 게다가 마흔 살 밖에 안된 매니저는 단순히 오래 버티고, 전형적인 미국 백인 여자 성향을 가진 사람으로 팀원들 공을 본인 앞으로 돌려 승진해 온 케이스다 보니 같이 일하기가 정말 고역이다. 이젠 10개월 가까이 같이 일하면서 나와 몇 번 1:1로 싸우다 보니 이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일 하게 내버려 두는 편이다. 괜히 건드렸다가 내가 몇 번 부사장 및 사장과 직접 면담에서 계속 지속될 경우 나도 대응하겠다고 이야기해 두니, 매니저도 이젠 내가 그냥 조용하게 넘어가는 동양인 1명으로 보진 않는다. 그러니 서로 거리를 지키고, 직장에서 정해진 일만 하고, 나는 내 월급이랑 보너스 챙기고 집에 간다. 이번 출장 역시 내가 나가면 본인이 업무 대리를 해야 하니 엄청 말이 많았는데, 이 출장을 승인받는 25살 동료가 당차게 내가 알려준 대로 밀어붙여 성공시켰다. 가끔 회사를 다니다 보면 이렇게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이 든 나 같은 동료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잘 매니징 하는 친구들을 보면 대단하다 싶다. 나는 저 나이에 어리바리하고 눈치보기 바빴는데, 어린데 조언을 잘 듣고 처리해 내는 성격도 능력이다 생각하며 젊은 동료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앞으로 잘 돼서 나를 꼭 불러달라고 농담 삼아 신신당부했다.
이 친구와 또 한 명, 나와 친하게 지내는 멕시코 지사의 동료와 휴스턴 공항에서 만나 산 살바도르로 향하는 길은 평소 매니저와 내가 좋아하지 않는 팀원들과 가는 출장과 사뭇 달리 즐거웠다. 같이 출장 가는 사람이 다른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절반이라니, 역시 회사 생활 스트레스 태반은 사람이다. 시카고에서 약 7시간, 경유 시간까지 해서 꽤 오랜 시간이 걸린 중남미의 엘 살바도르의 산 살바도르 공항은 내리자마자 생각보다 얼마 없는 인파와 깨끗한 공항에 기분이 좋았다. 멕시코 시티 이런 곳은 하수구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데다가 낙후된 시설에 긴장감이 도는데 산 살바도르는 새로 지어진 곳인지 아주 밝고 좋았다. 게다가 대한민국 국적자가 자주 방문하지 않다 보니, 내 여권을 보고 환영한다며 한국 사람이냐고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해 주는 입국 심사관도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지구 반대편, 한국 사람들이라면 의례 뉴스에서나 들어볼 만한 나라에서 한국어로 인사해주는 친절함이라니. 게다가 미국, 멕시코 국적자 동료들과 달리 한국인은 입국세를 내지 않아도 되었다. 대한민국 여권파워란 항상 출장이나 여행 다닐 때마다 느끼지만, 편하고 좋다. 소소한 푼돈이라도 아낄 수 있으니, 기쁨 아니겠는가.
공항을 나가 산 살바도르 시내를 향해 가는 길 동안 푸른 하늘과 울창한 푸른 나무들은 동남아 같은 분위기이기도 했지만, 선선한 날씨가 여기가 중남미구나 느끼게 했다. 후끈한 동남아 더위와 달리 햇살은 뜨겁고 바람은 시원한 날씨로 커피 벨트 지역답게 완벽한 날씨였다. 뜨거운 햇살과 시원한 바람, 적당한 습도까지 왜 커피가 잘 자라는지 알겠다 싶을 정도로 날씨가 좋았다. 그리고 화산 지형이 많은 엘 살바도르의 풍경은 한국 산골짜기 같기도 했다. 여기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갱단과 각종 범죄로 위험한 국가라고 하기엔, 너무 평온하고 좋은 날씨, 친절한 사람들 덕분에 상상이 가지 않았다.
우리는 인터콘티넨탈 호텔에 내려 가까운 쇼핑몰도 방문했는데, 엘 살바도르가 관광객이 아직 많이 유입되지 않다 보니 백인 동료와 한국인인 우리는 시민들이 신기하게 쳐다보는 눈길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고 기분 나쁜 시선이라기보다, 외국인이 신기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열심히 우리한테 인사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마치 우리 남편이 한국에 가면 지방 소도시 여행 시 어린아이들이 열심히 "하이!" 하는 모습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케이팝의 인기가 대단한지, 이 작은 쇼핑몰 메트로센트로 지역에 노래가 블랙핑크, 방탄소년단, 스트레이키즈 등 계속 나왔다. 패션 또한 한국 젊은 20대처럼 입고 있는 학생들이 많아서 신기했다.
출장 내내 업무가 바빠 정신이 없었지만, 같이 간 동료들과 어느 정도 합이 잘 맞아서 어째 저째 업무를 잘 끝낼 수 있었다. 어린 친구가 생각보다 모르는 업무가 많아서 현장에서 가르쳐주다 보니 좀 답답하긴 했으나, 잘 따라와 줘서 끝에는 유종의 미를 거뒀다.
일을 마치고 벤더사 분들과 저녁을 먹고 돌아다닌 산 살바도르는 인파로 가득했다. 현지인들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고, 너도 나도 산 살바도르 다운타운인 센트로 지역을 가족, 연인들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24시간 개방하는 산 살바도르 도서관엔 저녁 11시에도 어린아이들이 도서관에서 놀고 있었다. 벤더사 분들은 지난 몇 년간 이 지역이 너무 위험해 밤에는 나오지도 못했고, 그 후엔 코로나가 닥쳤고, 이젠 도시가 안전해져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고 했다. 그리고 중남미 지역에서 가장 큰 무료 도서관이라고 보여준 곳은 한국에서는 쉽게 찾을 수 있는 시립 도서관 같았지만, 무척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에 발전하는 국가가 가질만한 자부심이겠구나 싶었다.
사실 현지인들이 좋아하는 부분과 관광객들이 선호하는 곳은 다르다. 현지인들은 더럽고, 낙후되어 있으며, 별 볼 일 없는 길거리 음식점이나 코코넛 가게보다 세련되고 신식처럼 보이는 서양식 음식점과 쇼핑몰을 보여주려 한다. 그들의 눈엔 미국이나 한국은 발전하고 잘 사는 도시이고, 가난은 창피한 것이라 숨기고 싶어 했다. 하지만 한국도 여전히 낙후된 뒷골목이 존재하고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물론 절대적인 돈의 가치는 훨씬 우리네가 잘 벌지 몰라도, 막상 먹고살고 하다 보면 한 푼이 아쉬운 생활이란 서민이면 다 비슷하지 않을까. 물론 임금대비 물가는 중남미가 훨씬 높아, 그들의 삶이 더 고단할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삼키며 4박 5일 산 살바도르에서의 출장 업무를 보냈다.
같이 간 동료들과 맛있는 음식도 먹고, 업무도 하고, 여기저기 구경을 하다 보니 1주일이 금세 끝났다. 여기저기 오가며 보이는 목가적인 풍경과 여유로운 중남미의 풍경은 항상 새로운 나라의 매력을 일깨워주곤 한다. 엘 살바도르는 근교 중남미나 남미 국가에 비해 관광자원으로 내세울 만한 것이나 콘텐츠가 아직 구비가 덜 되어 있는 느낌이긴 했으나, 출장지로선 좋은 인상을 주었다. 너무 관광화되어 있는 코스타리카, 멕시코에 비해 순수하고 외국인을 손님으로 환영해 주는 듯한 분위기가 좋았다. 그리고 남미 특유의 매너와 여유로움은 그들의 이런 태도는 가정교육에서 온 것일까 종종 궁금해지곤 했다. 물론 다소 황당한 질문이나 아시아에 대한 무지한 질문도 있었지만, 입장 바꿔놓음 똑같을 테니 크게 개의치 않았다. 특히 남성들이 전반적으로 여성들에게 친절한 매너는 올 때마다 신기하다. 남미 전역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아무리 삶이 팍팍하다 해도 여성들에게 친절한 남미 남자들을 보면 신기하다 생각한다. 매번 차 문을 열어주려고 달려오는 기사 아저씨와 빨리 문 열고 나가서 닫아버리려는 나와의 은근한 신경전이 웃겼는지 동료가 차 문 열어주는 거 싫냐길래 나는 얼른 출발하는 게 더 좋아~라고 대답했다.
체크아웃을 하는 마지막 날에는 잘 가라는 귀여운 글이 적힌 케이크 두 개를 조식당에서 챙겨주셨다. 그리고 매너 좋은 조식당 지배인분이 담에도 꼭 만났으면 좋겠다고, 한국어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해주셔서 귀엽고 감동적이었다. 웃긴 건, 조식당에 간 사람은 나를 포함해 미국인 동료 한 명, 멕시코 지사에서 온 동료 한 명이었는데 나를 포함한 여자 미국인 동료에게만 주는 듯한 2개의 케이크가 있었다. 내가 멕시코 동료한테 "니 건 안 줘?" 하니까 "남자한테 케이크가 어딨어? 물어보면 욕할걸?"라면서 둘이 신나게 깔깔 웃었다.
이래저래 1주일 출장을 마치고 시카고로 다시 돌아오는 길은 즐거운 출장이라도 피곤이 쌓였는지 상당히 길고 정신없이 느껴졌다. 휴스턴에서 2시간 레이오버는 인파와 공항 특성상 빨리 줄을 뛰어넘을 수 있는 TSA pre 라인이 없어 한참을 기다리다 보니 겨우겨우 탑승구에 도착했다. 그리고 조용하고 깔끔했던 산 살바도르 공항과 달리 정신없고 시끄러운 휴스턴 공항에 있다 보니 미국으로 돌아왔구나 느껴졌다.
올해 마지막 출장이 된 엘 살바도르 출장은 꽤 즐거웠다. 이 꼰대 회사에서 일한 지 10개월 차가 되고 있는 12월, 거의 두 달에 한 번씩 출장을 가고 있는 내 일상에서 가장 즐거운 출장이었다. 아마 내가 좋아하는 동료들이랑 갈 수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참 1억 벌기 힘들다. 미국에서 1억 넘는 연봉은 서민 중에 서민이고, 교민들 커뮤니티에선 잘 버는 사람들만 득실득실하는데 나는 그거에 비하면 평균 이하인데도 정말 돈 벌기 쉽지 않다. 다들 나보다 열심히 사는 걸까? 내 깜냥으론 이 정도 일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다. 2025년엔 좀 더 좋은 회사로 이직해서 이렇게 힘들었던 출장이 그리워질 정도로 지루하고 심심하고 일 없는 회사를 다니고 싶다. 아 인생이여. 언제쯤 돈 많이 주고, 일 안 어렵고, 사람들 좋은 유니콘 같은 직장을 찾을 수 있을까요. 마치 많이 먹어도 날씬하고 싶다 같은 답 없는 투정을 부려보지만, 계속 투덜거리다 보면 재수 좋게 한번 꿈같은 직장을 찾을 수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