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6 월요일
산티아고 순례길 27일 차
Molinaseca 몰리나세까 ~ Villafranca del Bierzo 비야프랑까 델 비에르소
31.54km / 9시간 11분 / 맑음 ↔ 흐림 ↔ 비
일어나자마자 확인 한 기상 예보에 따르면 강수 확률이 매우 낮았다. 설령 비가 오더라도 강수량은 적다고 되어 있었다. 두 가지 정보를 바탕으로 내린 결론은 오늘 비가 내리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우천에 대비한 복장과 정신 무장을 갖추지 않은 채 길을 나섰다.
초반에는 맑은 하늘 덕분에 기분과 발걸음이 상쾌했다. 30분가량 지나자 먹구름이 짙어지더니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멘탈이 무너졌다. 가던 길을 멈추고 배낭커버를 씌운 후 깊숙이 넣어 놓은 우비를 꺼내 입었다. 한 시간쯤 갔을까. 이번에는 비가 멎더니 구름 뒤에 숨어 있던 뜨거운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 또 비가 내릴지 알 수도 없거니와 지금의 리듬을 깨트리고 싶지 않아 비옷을 입은 채 계속 걸었다. 안 그래도 몸에서 열이 올라와 답답한데 우비 안 쪽에 습기까지 차면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끈적하고 불쾌했다. 출발 전 확인 했던 일기 예보를 다시 한 번 믿어 보기로 했다. 낮은 강수 확률을 뚫고 이미 비가 왔으니 이제 더 이상 내리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비옷을 벗어 가방덮개 사이로 쑤셔 넣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가는 도중 얼굴에 한두 방울 물이 떨어졌다. 보슬비라고 해서 안일한 마음가짐으로 무시하고 걷다가 옷과 신발이 전부 젖어 고생했던 기억이 아직은 생생했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 귀찮음을 무릅쓰고 재차 우의를 꺼내 입었다. 얼마 후 다시 강렬한 햇살이 내리쬐었다. 그렇게 우비를 벗고 입기를 10번은 반복한 듯하다.
덕분에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다. 걷는 동안 멈추지 않고 백팩을 앞으로 맨 상태에서 우비를 꺼내어 입은 후 모든 장비를 원래의 위치로 옮겨 오는 일련의 동작을 할 수 있다. 반대로 걸으며 비옷을 벗어 배낭커버에 끼우는 것 역시 가능하다. 전혀 뿌듯하거나 자랑하고 싶지 않은 쓸데없는 묘기다. 정신적으로 상당히 힘든 하루였다.
오늘의 변덕스러운 날씨를 대변해 주는 무지개
어제 점심 식사를 2시간 동안이나 하는 바람에 처음 계획한 마을까지 가지 못한 경험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식당을 가는 대신 식료품점에서 점심거리를 사서 간단히 때우기로 아내와 합의했다. 의견을 수렴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거짓말처럼 대형 마트가 눈앞에 나타났다. 들어가서 빵 몇 종류와 요깃거리들 그리고 1.5€ 짜리 저렴한 와인 한 병을 구매했다. 와인은 계산 후 열어서 비어 있던 물통에 옮겨 담고 무거운 유리병은 버렸다. 걸으면서 한 모금씩 마시면 목마름도 가시고 시큼한 맛 때문에 정신도 맑아진다. 무엇보다 알코올이 몸에 돌면서 기분이 처지지 않는다. 순례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진리 'No Vino, No Camino'(와인 없이는 순례도 없다)를 실천했다.
마을 어귀를 벗어난 곳에 잠시 앉아 간단히 배를 채웠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표식에 적힌 잔여 거리가 어느새 200km 미만으로 줄었다. 많이 왔다. 대견하다. 얼마 남지 않았다. 이 길을 더 이상 걸을 수 없다는 것이 한 편으로는 아쉽다.
아내가 저녁을 요리해 먹고 싶다 해서 주방이 없는 공립 알베르게 대신 사립 알베르게에 체크인했다. 시설도 좋고 청결해서 비용을 더 지불하는 것이 아깝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양고기가 당겨 머무는 마을마다 식당과 정육점을 돌아다녔다. 오늘도 찾아 나섰으나 실패했다. 알고 보니 스페인에서는 흔히 구할 수 있는 식재료가 아니라고 한다. 아쉬운 대로 숙소 앞 식료품점에서 돼지고기 항정살과 야채를 장 봤다.
공용 주방에서 재료를 손질하고 있는데 한국인 규님과 독일인 Flo(플로), 그리고 덴마크인 Josephine(조세핀)이 저녁 준비를 하러 왔다. 서로의 요리를 조금씩 나누며 풍족한 식사를 했다. 규님은 플로, 조세핀과 함께 순례길 동지를 이루어 여정을 함께 하고 있다. 그 셋은 각자의 속도에 맞춰 따로 걷다가 같은 숙소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Leon(레온)에서의 한식 파티 당시 모두(장O님, 시O님, 보O님)들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는지 산티아고에서도 마지막 만찬을 즐기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지난번과 동일하게 에어비앤비 공유 숙소를 잡고 한식을 요리해 먹기로 했다. 멤버는 두 명을 추가하기로 했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 만난 여러 한국인들 중 나이대가 비슷하고 기존 인원들과 결이 맞는 사람이어야 했다. 만장일치로 규님과 조님이 후보에 올랐다. 이제 약 일주일 후면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슬슬 후보자들에게 함께할 의향이 있는지 확인할 시점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 옆 테이블에 앉은 플로와 조세핀에게 양해를 구하고 우리가 앉은 테이블로 규님을 초대했다. 규님은 플로, 조세핀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너무 즐겁지만 가끔은 한국말이 그립다며 운을 뗐다. 자연스레 산티아고 한식 파티로 대화 주제를 옮겼고 초청에도 흔쾌히 응해주었다. 단체 채팅방에 입장하면서 공식적으로 산티아고 한식 파티 멤버에 규님이 합류하게 되었다. 일주일 뒤에는 또 어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지 벌써 기대된다.
본 매거진은 저와 아내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생장 피에 드 포흐(Saint Jean Pied de Port)에 도착 한 날(23.10.10)부터 목적지인 피스테라(Fisterra)에 당도하기까지 40일 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직접 기록한 일기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더 많은 사진은 @the_kangkang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