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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uisLee Jun 17. 2024

산티아고 까지 100km

31일 차 : 사리아에서 뽀르또마린까지

2023.11.10 금요

산티아고 순례길 31일 차


Sarria 사리아 ~ Portomarin 뽀르또마린

24.17km / 8시간 16분 / 비, 흐림




아침을 간단히 먹고 숙소를 나섰다. 비가 오고 있었다. 출발지 Sarria(사리아)를 벗어나기 전 마을 이름이 크게 적힌 조형물이 나왔다. 순례자 몇 명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무리 속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스웨덴 출신 Fia(피아)였다. 분명 열흘 전쯤 신발 때문에 버스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다고 했었다. 우리와는 일정이 완전히 어긋나 버리는 바람에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다. 피아도 우리를 발견하고는 반가워했다. 조형물을 배경으로 함께 기념사진을 남겼다. 인연이 닿으면 언제든 재회하게 되는 순례길의 마법(Camino Magic)을 만끽하는 순간이었다.



순례를 완주한 순례자는 산티아고에서 인증서를 발급받을 수 있다. 순례자 사무국에서 인정하는 완주의 기준은 100km 이상 걸은 자에 한한다. 오늘의 출발지 사리아는 산티아고와 약 115km 떨어져 있다. 증서를 받는 것이 목적인 사람들은 숙박 시설 등의 인프라가 풍부한 사리아에서 순례를 시작한다. 자연스레 새로운 얼굴들이 많이 보이게 된다. 우리처럼 먼 곳부터 걸어온 순례자들 중 몇 명은 인증서가 목적인 '가짜'들 때문에 사리아 이후 구간을 좋아하지 않는단다. 숙소와 식당의 분위기가 느슨해지고 소매치기가 빈번해진다며 조심하라는 당부도 했다.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선뜻 동조할 수 없었다. 짧은 거리를 걸을 뿐 어쨌거나 같은 순례자다. 일부의 치우친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부터 처음 보는 사람들이 길에 넘쳐났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왜 사리아를 기점으로 마음이 차갑게 식는지 이해할 만한 장면을 목격했다. 숲길을 정신없이 걷는 와중에 갑자기 어디선가 매캐한 연기가 코를 찔렀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앞에 걸어가는 순례자의 코와 입에서 담배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지난 한 달 동안 흡연자를 여럿 보았으나 순례길 위에서 흡연보행을 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경로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 최대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했다. 


미간이 찌푸려졌다. 속도에 박차를 가해 앞지르면서 눈치를 주려 했다. 흡연자는 일행과 수다를 떠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컨택에 실패하는 바람에 그냥 지나갔지만 한 번 더 그런 모습을 보일 경우에는 참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담배는 개인의 기호이기 때문에 피는 행위 자체를 나무랄 수 없다. 다만 뒤따라오는 사람을 배려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강하게 들었다. 담배 불씨로 인한 산불의 위험도 있기 때문에 순례길에서의 흡연은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심란해진 마음은 이내 100km만 걸어도 증서를 발급해 주는 순례자 협회에 대한 불만으로 번졌다. 일부가 모두를 대변하지는 않기에 사리아에서부터 순례를 시작하는 이들에 대한 편견은 갖지 않으려 했다. 그럼에도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이른바 순례 정신에 위배되는 행동을 목격 한 이후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씁쓸함쉽게 지울 수는 없었다.





휴식을 위해 바르에 들렀다. 자리에 앉고 얼마 되지 않아 피아도 들어왔다. 빈 테이블이 없어 합석해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오늘 묵을 알베르게에 예약을 하기 위해 분주했다. 숙소 주인과 통화를 하는데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도착 마을에 평이 좋은 숙소가 많지 않아 미리 침대를 확보해야 안심할 수 있었다. 저녁에 요리를 하고 싶다는 아내의 특별 요청 사항도 있던 터라 반드시 주방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선택지가 한정적이라 더욱 초조했다. 곤혹스러워하는 내 모습을 보던 피아가 도와주겠다며 스마트 폰을 건네어 받았다. 피아는 스웨덴 사람이지만 칠레 출신 남편과 함께 수도 스톡홀름에 살고 있다. 덕분에 원어민 수준의 스페인어를 구사한다. 나의 의중을 파악한 피아가 잠시 통화를 하더니 문제없이 해결되었다며 안심하란다. 정말 고마웠다. 남은 하루 동안 숙소 걱정 없이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따스한 인류애가 느껴졌다.




산티아고까지의 잔여 거리가 적힌 순례자용 표시석이 100km 남았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표시석은 이곳을 지나간 수많은 이들의 낙서로 빼곡했다. 기념사진을 찍고 발길을 옮기는데 만감이 교차했다. 벌써 700km 이상 걸었다는 성취감, 큰 사고 없이 왔다는 뿌듯함, 남은 거리가 짧다는 안도감 등이 들었다. 하나 가장 큰 감정은 이제 며칠만 지나면 더 이상 걸을 수 없다는 아쉬움이었다.


지난 30여 일을 돌아보면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되었던 순간들이 많았지만 전체 일정을 대표하는 딱 하나의 감정을 꼽으라면 단연코 행복감이다. 길 위에서 만난 인연들이 베풀어 준 선의와 친절로 인해 메말라 있던 인류애가 충전되었다. 이국적인 문화와 환경을 접하고 잠시 방황하기도 했지만 그 안에서 피어나는 이곳만의 정(情) 덕에 금세 적응할 수 있었다. 재료 본연의 맛을 살려 요리하는 식당 음식이제는 즐기게 되었다. 맛있는 와인을 싼 값에 매일 마실 수 있는 것도 긍정적인 요소다. 무엇 보다 머리를 비우고 아무 스트레스 없이 보내는 나날들이 너무 소중하다.


하루 종일 걱정할 거라곤 먹고, 자고, 걷고, 싸는 것뿐이다. 그 외에는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앞으로 무얼 하고 싶은지 등 나 자신에 대해서만 고민하면 된다. 그마저도 기한이 정해진 것이 아닌지라 아무도 다그치지 않고 숙제 검사하듯 확인하려 들지도 않는다.


단점이 없진 않지만 수많은 장점들이 그것들을 모두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값진 경험을 했다. 지금껏 잘 걸어왔으니 남은 일정도 무사히 마칠 수 있기를 기원하며 다시 힘을 냈다.





8시간 넘게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해 대는 비를 맞으며 피아가 예약해 준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체크인 후 샤워와 빨래를 마치고 장을 보러 가는 길에도 굵은 장대비를 맞았다. 악천후를 뚫고 돼지고기와 야채 그리고 와인 한 병을 사 왔다. 주방에서 저녁을 요리해 먹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본 매거진은 저와 아내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생장 피에 드 포흐(Saint Jean Pied de Port)에 도착 한 날(23.10.10)부터 목적지인 피스테라(Fisterra)에 당도하기까지 40일 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직접 기록한 일기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더 많은 사진은 @the_kangkang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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