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친한 순례자들 몇 명이 바르와 레스토랑에서 파는 음식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았다. 전반적으로 스페인의 식문화 수준이 너무 낮아서 먹기 힘들단다. 다른 대안이 없거니와 열량 보충을 위해 억지로 입에 넣을 수밖에 없다는 말도 했다. 아내와 나도 초반에는 적잖이 충격 받았었다. 감자튀김이 눅눅하고 돼지고기는 지방이 적은 살코기 위주라 퍼석하다. 샐러드를 시키지 않으면 야채를 구경하기 힘들다. 유럽에서는 빵이 우리나라의 밥 역할을 하는데 그마저도 딱딱하고 부대낀다. 조리 방법도 상당히 단순하다. 육류나 생선을 통째로 기름 두른 팬에 구워 접시에 담아낸다. 감칠맛을 돋우는 특색 있는 양념 대신 소금으로만 간을 맞춘다. 와인이 싸고 맛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지금은 잘 적응해서 아무 문제가 없다. 신선한 식재료 고유의 맛을 유지하는 단순한 조리법 덕에 도리어 만족감이 높다. 돼지고기는 자꾸 먹다 보니 담백한 맛을 즐기게 되었다. 메누 델 디아를 시키면 전채 요리로 샐러드를 선택할 수 있어 채소류도 챙겨 먹을 수 있다. 이제는 빵이 없으면 허전하다. 하루 종일 와인을 마신다. 낮에 걷다가 휴식을 위해 바르에 들러 한 잔씩 홀짝이면 약간의 취기가 오르면서 기운이 회복된다. 저녁에는 식료품점에서 3€ 언저리의 와인 한 병을 사서 식사와 곁들인다. 무엇보다 감자칩 과자가 정말 맛있다. 원재료인 감자가 크고 품질이 좋은지 두께가 상당하다. 우리는 항상 소금을 적게 친 제품을 고르는데 가격도 비싸지 않아 안주와 간식으로 애용한다.
점심을 먹기 위해 12시쯤부터 식당을 찾아다녔다. 스페인의 식사시간은 오후 2시부터다. 바르에서는 그전까지 조리가 필요 없는 간단한 식음료만 먹을 수 있다. 전문 레스토랑은 아예 열지도 않는다. 우리처럼 정오에 끼니를 해결하고픈 사람들을 위해 주방을 일찍 가동하는 음식점이 드물게 있기는 하다. 어제까지는 다행히 그런 곳에서 끼니를 해결했으나 오늘은 운이 없었다. 바르에 앉아서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기에 배고픔을 참고 계속 걸어야 했다.
출발한 지 5시간가량 되자 작은 마을이 나왔다. 지도 어플에서 후기가 좋은 음식점 몇 곳을 찾아갔지만 역시나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다음 마을 까지는 최소 두 시간을 더 가야 했다. 평점이 낮은 곳이라도 도전을 할지 아니면 발걸음을 재촉할지 결단 내려야 했다. 현재 컨디션으로 미루어 두 번째 선택지는 감수해야 할 위험이 너무 컸다. 막상 다음 마을에 갔는데 문 연 곳이 없으면 낭패다. 배가 고프면 유난히 예민해지는 아내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첫 번째 옵션을 고르기로 했다. 평점이 나빠 봐야 한 끼 식사일 뿐이다. 당장은 맛보다 허기를 달래는 것이 우선이므로 배를 채우는 것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주인이 매우 불친절하다는 후기가 가득한 식당 한 곳이 영업 중이었다. 이용 후기는 주관적이고 일부 까다로운 손님이 악의적으로 작성한 것일 수 도 있다. 나무랄 데 없는 식사와 서비스를 제공받고도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은 어딜 가나 있기 마련이다. 실제로 박한 리뷰와는 반대로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던 경험이 여러 번있었다. 이번에도 실낱같은 희망을 품은 채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부는 의외로 포근한 분위기였다. 현지인 손님도 제법 있었다. 카운터 뒤에 있는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는 우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부정적인 리뷰들이들어맞을거란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메뉴판을 가져다주기를 기다렸으나 한참이 지나도 그럴 낌새가 없었다. 아무리 스페인 사람들이 느긋하다고는 하나 정도가 심하다 느낄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었다. 할 수 없이 카운터로 직접 다가가 메뉴판을 요청해서 다시 테이블로 가지고 왔다. 아내와 나의 주문을 취합하고 주인 쪽을 응시했다. 손님들과의 수다 삼매경에 빠져 주문을 받으러 올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냥 기다리기엔 너무 배고팠고 쓸데없는 기싸움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지체할수록 우리만 괴롭다. 메뉴판을 들고 카운터 쪽으로 다가가 주인에게 주문사항을 전달했다. 내 얘기를 듣는 둥마는 둥하던 주인은 메모지에 무언가를 끄적이고는 주방에 건넸다.다행히 요리사는 손이 빨랐다. 생각보다 금방 음식이 나왔다. 맛 또한 기대 이상이었다. 주인의 접객 태도만 바뀌면 이곳에 대한 평이 훨씬 개선될 수 있을 텐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러 카운터로 가자 주인의 태도가 사뭇 달랐다. 가격을 확인하고 거스름돈을 내어 주는 모든 과정이 굉장히 적극적이고 일사불란했다. 기가 막혔다. 손님이 들어오건 말건, 주문을 하건 말건 신경도 안 쓰더니 돈 받을 때는 의욕적이다. 씁쓸함을 뒤로하고 식당 문을 나섰다.
숙소에 도착해서 샤워와 빨래를 마치고 침대로 왔다. 아내는 독일 출신 순례자 친구 코비가 나를 찾더라고 전해 주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서둘러 코비가 있는 곳으로 갔다. 코비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속삭이며 고민거리를 털어놓았다. 혹시 빈대에 물린 적이 있냐며 팔과 다리를 보여 주었다. 나와 아내 모두 경험이 있어 유심히 관찰했으나 빈대의 특징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감각이 발달하지 않은 빈대는 혈관을 찾기 위해 앞으로 조금씩 이동하면서 주둥이를 꽂기 때문에 약 5mm 간격으로 연속적인 자국이 생긴다. 코비의 상처는 모기에 물린 것처럼 크기가 컸다. 걱정이 가득한 코비에게 빈대가 아닌 것 같다며 안심시켜 주고 자리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으러 나갔는데 가는 식당마다 전부 닫혀있었다. 할 수 없이 마트에서 인스턴트식품을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공용 주방에서 전자레인지로 음식을 덥혀 먹는데 다른 순례자 친구들도 저녁거리를 들고 하나 둘 모여들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러다 누군가 세탁실에 속옷만 한 장 입은 채로 앉아서 옷가지들을 건조하고 있는 사람을 보았냐는 말을 꺼냈다. 정황상 코비인 듯했다. 빈대에 물려 그런 거라며 저마다 입방아를 찧어댔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코비가 나에게만 조심스레 털어놓은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집단 지성의 힘을 빌려 자신의 몸에 난 상처가 빈대로 인한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나 보다. 착하고 순한 녀석이 졸지에 모두의 놀림감이 되어버려 안쓰러웠다. 듣다못해 본인이 물리고 싶어서 물린 것도 아니고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라며 코비를 두둔했다. 나 역시 순례길 초반에빈대를 경험했을 만큼 흔하고 너희들 중 누군가 당장 오늘밤 겪을 수 도 있다고 했다. 아내도 나를 거들어 준 덕에 비아냥거림이 수그러들었다. 불쌍한 녀석. 매일 마주치는 동료들이 본인을 그렇게 씹어댄 것을 알면 얼마나 속상해할까. 처음 겪는 일이고 아직 어려서 대처 방안이 미숙했나 보다. 내일 코비를 만나면 좀 더 친근하게 대해주어야겠다.
본 매거진은 저와 아내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생장 피에 드 포흐(Saint Jean Pied de Port)에 도착 한 날(23.10.10)부터 목적지인 피스테라(Fisterra)에 당도하기까지 40일 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직접 기록한 일기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