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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uisLee Jul 29. 2024

기억 나진 않지만 기분 만큼은 좋음

37일 차 :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에서 네그레이라까지


2023.11.16 목요

산티아고 순례길 37일 차


Santiago de Compostela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 ~ Negreira 네그레이라

22.75km / 6시간 46분 / 맑음





오랜만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 기온마저 따듯해서 겉옷을 벗어야 할 정도였다. 15년 전에 걸었던 그 길을 다시 왔다는 벅찬 감정이 걷는 내내 올라왔다. 오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발걸음이 너무나도 가벼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산티아고에서 순례를 종료하기 때문에 길이 한적했다. 덕분에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홀로 사색에 빠질 수 있었다. 알베르게에 자리가 없을까 노심초사할 필요도 없었다.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도착지까지 가는 동안 통과하는 마을은 많은데 정작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바르와 식료품점이 거의 없었다. 출발 3시간 만에 처음으로 영업 중인 바르가 나왔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적으면 서비스나 품질이 낮고 가격이 비싼 경우가 많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가게에 들어갔으나 다행히 주인이 친절했고 음식도 만족스러웠다.



걸으며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은 예전에 본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아 모든 것이 새로웠다. 이유를 고민해 보았다.


15년 전 마드리드에서 기차를 타고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진 저녁이었다. 기차역 근처 공립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하고 잠들었다. 분명 수십 개의 침대에 사람들이 빠짐없이 들어차 있었는데 아침에 눈을 떠 보니 그 넓은 공간에 나 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순례길에 대한 정보를 접하기 어려웠다. 해가 뜨기 전 이른 새벽에 출발해야 한창 더워지기 전에 일정을 마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가 없었다. 당황한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서둘러 숙소를 빠져나왔다. 그런데 아무리 걸어도 순례길 위에는 나 혼자 밖에 없었다. 점점 두려움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풍경을 즐기는 대신 무작정 빨리 가야겠다는 압박이 생겨났다. 어딘가 있을 바로 앞 순례객을 따라잡겠다는 일념 하에 시간당 6km의 속도로 거의 뛰다시피 했다. 풍경을 눈에 담으며 여유를 즐기는 대신 발을 헛디디지 않기 위해 시선이 아래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아무런 장면도 기억에 남지 않게 되었다. 첫날 숙소에 도착해서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고 이튿날부터는 일찍 일어나서 동이 트기 전에 길을 나섰다. 뇌리에 어렴풋이 남은 장면들은 그 후 생긴 것들이다.


걷는 동안 밝은 햇살과 아름다운 자연이 조화를 이룬 멋진 풍경들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때도 느긋한 마음을 갖고 눈여겨보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였다.



한식파티를 함께한 장O님과 조님이 물려준 장비들을 사용하니 걷기 훨씬 수월했다. 둘은 산티아고에서 순례를 마쳤지만 그들의 몫까지 함께한다는 알 수 없는 사명감이 들었다.




Negreira(네그레이라)에 도착해서 샤워와 빨래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는데 아내가 유난히도 힘들어했다. 저녁거리를 사러 15분 거리의 마트까지 도저히 못 가겠단다. 산티아고가 대부분의 순례객들에게 종점이다 보니 분위기에 물들었다고 했다. 아내는 은연중에 여정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도 느슨해졌다고 토로했다. 오늘 걸은 거리가 그리 길지 않았음에도 유독 힘들다는 말을 자주 한 것이 그제야 이해되었다. 애초에 순례길을 걷기로 했을 때부터 산티아고 이후의 100km 구간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긴장의 끈을 너무 일찍 풀어버린 듯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여유를 주고 그동안 혼자 장을 보러 가는 것 밖에 없었다. 사용가능한 주방기구들을 파악한 후 요리할 메뉴를 결정하고 필요한 식료품들을 정리하여 마트로 향했다.


장을 보고 오는 사이 기력을 되찾은 아내가 분주히 저녁 준비를 했다. 오트밀, 간 소고기, 토마토소스 등을 넣고 끓인 스튜를 식빵과 곁들여 먹었다. 한정된 음식재료와 열악한 주방환경에서도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내는 아내의 실력은 매번 감탄스럽다.




이제 순례길도 3일만 더 걸으면 완전히 끝난다.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와중에 아쉬움이 가장 크게 느껴진다. 반복되는 일과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별다른 걱정거리 없이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이 많은 행복을 가져다준다. 금전적 여유가 있고 몸이 버텨주는 한 끝없이 걷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본 매거진은 저와 아내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생장 피에 드 포흐(Saint Jean Pied de Port)에 도착 한 날(23.10.10)부터 목적지인 피스테라(Fisterra)에 당도하기까지 40일 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직접 기록한 일기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더 많은 사진은 @the_kangkang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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