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ank Lee Speaking Feb 29. 2024

두려움을 대하는 두 가지 방법

프로는 두려움을 마주하고, 아마추어는 회피한다고 하던데

사람 사는 세상을 감정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자니 두려움과 용기라는 심리가 근원에 자리하고 있되 이 둘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각양각색의 밝고 어두운 감정들이 즐비하다. 이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대물의 관계로, 하나가 존재하기에 다른 하나가 존재하며 하나가 없어지면 다른 하나도 없어진다. 상상컨데 이 둘은 세상에 탄생하기 시작할 때부터 한 쌍으로 태어났을테다. 질서와 혼돈(혼돈이 있기 전까지, 우리는 질서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빛과 어둠(어둠이 있기에 빛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두려움과 사랑(두려움이 부재한 세상에서는 사랑이 가득하겠으나 그것이 사랑임을 알 수 없다)의 관계는, 죽음이 있기에 삶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정신을 담고 있다.


두려움은 없어지지 않는다. 어둠과 혼돈도 마찬가지. 어쩌면 종교에서는 이러한 '악'의 존재 이유가 '선'을 더욱 빛내주기 위함이라고 설명할지 모르겠다. '악'을 '선'을 더 높이 숭배하기 위해 바쳐질 제물쯤으로 여기는 태도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아마 만족스러운 삶을 살지는 모르겠지만 진정 원하는 바가 사랑과 자유라면, 글쎄. 태초에 상대물로 탄생한 개념을 인간 관습을 잣대로 '선'과 '악'을 구별하여,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밀어내려 하는 관점은 우주의 질서와 모순된다. 삶의 전체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한 치의 거리낌 없는 활발발한 태도는 이런 모순과 거리가 멀다. 


두려움을 부정하는 것이 두려움을 대하는 첫 번째 태도이자 우리 사회에서 다수가 취하는 방식이다. 두려움이 없다고 허장성세를 부리기, 두려움이 있음을 알고 제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수양하기 등이 이러한 태도에 속한다. 두려움을 없애려는 처절한 시도는 두려움으로부터 도피하려 등 돌리고 있는 모양새를 취하게 되며, 이러한 심리적인 도피 자세는 생리적, 육체적 긴장을 낳기 마련이다. 이러한 미묘한 긴장은 무의식적이고 비언어적인 행동 양상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다. 은연중에 눈을 내리깔게 되며 눈빛에는 두려움이 스쳐가며, 목소리는 작아진다. 목소리가 커질지언정 음성을 통해 전달되는 에너지에는 자신감 대신에 두려움이나 분노가 묻어있기 마련이다. 


두 번째 태도는 두려움을 긍정하는 것인데, 여기서 긍정이란 낙관과는 거리가 멀고 '선'이나 '좋은 것'으로 애써 포장하려는 시도와도 거리가 멀다. 여기서 말하는 긍정이란 좋고 나쁨의 인간적 분류를 배제한 채, 중립적이고 담백하게, 존재하는 것을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두려움이 더 이상 '악'이 아니기에 도피하려 하지 않으며, '선'도 아니기에 그것을 끌어안으려 하지도 않는다. 한 마디로 집착이 사라진다. 두려움이 일어나면 담담하게 응시하며, 그것이 내면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저 인정한다. 어떠한 조치를 취하려는 태도를 완전히 항복한다. 그저 관찰만이 있을 뿐이다.


다이빙대 끄트머리에 서있다 보면 두려움은 점점 커지기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을 떼는 것이다. 두려움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말이다. 그것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것, 그것을 부정하고 도피하려 하는 것은 두려움을 크게 키우기만 할 뿐이다. 그 녀석이 그곳에 존재하도록 허락하되, 그것에 잠식당하지 않고 고요하게 응시하고 있다 보면, 거리를 두고 두려움을 관찰하고 있는 당신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그때 당신은 용기가 된 것이고, 두려움을 극복한 것이다. 두려움을 응시하는 것이 용기를 낳기에, 이 둘이 상대물인 것이다. 두려움을 딛고 발을 떼고 나면, 물 속에서 나올 때 당신은 심리적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다. 

작가의 이전글 입원 일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