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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심 May 12. 2024

구제옷을 입으면 엄마가 겹쳐보인다

나에게 잘 맞는 옷은 있어도 나이에 잘 맞는 옷은 없다.

구제시장을 처음 갔을 때가 생각난다. 활기찬 관문시장은 맛있는 기름내가 가득하다. 염통 꼬치, 국화빵, 떡볶이의 유혹을 뿌리치고 깊숙한 구석으로 들어가면 비밀스러운 구제 골목이 나타난다.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따라 양옆으로 구제가게가 줄줄이 붙어있다. 관문시장에서 만원으로 검은 봉지를 주렁주렁 매달고 온 친구가 마스크와 장갑을 필수라고 했는데 그 이유를 보자마자 알았다. 정갈한 구제 샵과는 달리 시장은 옷 무더기를 뒤적거려 보석을 발견해야 했다. 대신 파격적인 가격으로 독특한 디자인의 옷을 살 수 있다. 가디건과 니트는 5,000원에서 7,000원 사이에, 자켓은 만원 선에서 구할 수 있다. 물론 정찰제는 아니므로 사장님과 팽팽한 기 싸움은 필수다.      



“혹시 천 원만 깎아주실 수 있나요? 안에 얼룩이 있어서 세탁을 맡겨야 할 것 같은데….”   

  

사장님은 곤란한 척하다가 결국엔 다 수용해 주신다. 관문시장 구제 쇼핑이 대학 친구들 사이에 유행이 되었다. 심지어 친구들끼리 ‘이 옷 얼마게?’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비싼 옷을 입으면 자부심을 느낀다는데, 우리는 오히려 싼 가격에 자부심을 느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옷장의 반은 구제 옷이 차지하고 있다. 심지어 기성복보다 더 오래 입는다. 좋아하는 멜빵바지는 8년이 넘도록 입고 있다. 엄마는 서른이면 멀끔한 옷을 입을 때가 아니냐고 잔소리를 퍼붓는다. 엄마 말에 따라 서른이 돼서도 구제 옷을 왜 놓지 못하는지 생각해보았다. 구제 옷을 입었을 때, 묘하게 편한 구석이 있다. 쾌쾌한 석유 냄새와 빳빳한 재질이 새 옷의 매력이라면 구제는 이미 누군가의 몸에 걸쳐온 상태라 포근하다.      


냄새와 착용감으로 옷의 출처를 상상하는 재미도 있다. 노란 꽃 자수가 있는 긴 리넨 치마를 입을 때면 일본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전거를 타는 아기자기한 여자를 상상하곤 한다. 또 리본 무늬가 있고 어깨에 뽕이 가득한 니트를 입을 때면 맨해튼의 횡당보도를 당당히 걷는 앞머리 뽕이 가득한 아치 눈썹의 여자를 떠올리게 된다. 가끔은 엄마가 겹쳐 보인다. 본가에서 먼지 쌓인 앨범을 뒤적거린 날, 엄마의 옛날 사진을 발견했다. 20대의 엄마는 수수한 매력의 패셔니스타였다. 지금은 도라에몽 주머니보다 더 많은 물건이 있을 것 같은 항아리 바지만 입지만 20대에는 달랐다. 현재 내가 입는 옷들이 모두 엄마의 옷 같았다. 카라 원피스와 빈티지한 청치마에 티셔츠까지도 내 취향이었다. 엄마가 자기 옷은 이상한 것만 고르면서 내 옷만큼은 기가 막히게 찾아줄 수 있었던 배경을 알게 되었다. 이젠 구제 쇼핑할 때면 엄마의 어릴 적 사진이 기준이 된다. 편하지만 개성과 멋은 포기하지 않는 패션. 싱그러운 보조개 미소. 동그란 얼굴. 부동의 숏컷.      


‘잃어버린 낭만에 대하여’라는 오래된 노래가 있다. 20대의 엄마를 상상하며 옷을 고른 날에는 그 시절의 낭만이 느껴진다. 모든 게 조금씩은 느려도 기다림의 미학이 있었던 때였다. 엄마와 말이 통하지 않아 멀어진 날들이 있었다. 현재와 ‘엄마’만 놓고 봤을 때, 거리 두기는 더 심해진다. 근데 20대의 엄마 사진을 생각하면 엄마가 아닌 ‘인희 씨’로 보게 된다. 낭만 있게 멋도 부리고, 싱그러웠던 인희 씨. 어떤 시절을 관통했길래 ‘잃어버린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가 유행했을까. 지금의 엄마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감히 상상해보면 지난하다. 엄마에게 사진 속 옷이 남아있다면 물려달라고 했다.      


“다 버렸지. 나이 들면 못 입어. 짐이야.”      


멜빵바지는 내 옷장의 터줏대감이다. 초록색 체크무늬의 주머니와 가슴 쪽에 고양이 자수가 포인트다. 자주 입어서인지 보풀이 올라왔다. 버릴 시기가 이미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손이 자꾸 간다. 아마 시간이 지나도 ‘은심 씨’로 남고 싶어서가 아닐까. 나를 잘 표현할 수 있는 옷은 대부분 구제다. 나에게 잘 맞는 옷은 있어도 나이에 잘 맞는 옷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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