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은심 May 14. 2024

우리는 모두 비(非)빈곤자다

총선 시즌이면 ‘빈곤’이라는 단어가 더 맴돈다. 선거 운동이 한참이었던 우리 동네는 ‘서민’을 언급하며 서민답지 않은 후보자의 얼굴이 박힌 현수막이 곳곳에 달려있었다. 퇴근길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현수막 속 후보자가 대뜸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한눈에 봐도 부내 나는 아저씨였다.  

    

“후보자입니다. 서민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그의 손이 민망할까 덥석 악수에 응했다. 손이 보들보들했다. 횡단보도에 서 있던 다른 사람들도 후보자의 보들보들한 악수를 피할 순 없었다. 미소가 떠나지 않는 그의 얼굴을 보며, 보통선거의 힘을 체감했다. 부유하든 아니든 1인 1 투표. 선거는 양적 싸움이기 때문에 부자들은 수적으로는 서민을 이길 수 없다. 자본주의의 몇 없는 옥에 티다. 만약, 투표권을 사고팔기가 가능했다면, 악수했던 후보자는 평생 볼 일이 없었을 것이다.     

 

횡단보도는 금세 조용해졌다. ‘서민을 위한 정책’ 현수막만 남겨두고 다른 동네로 악수 원정대를 떠났다.

현수막에 적힌 정책들이 서민 당사자의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아니.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횡단보도에 좀 더 오래 서 있어 보면, ‘서민’과 ‘빈곤’은 한 끗 차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손수레에 자신의 몸집보다 큰 폐지를 꾹꾹 눌러 담아 아슬하게 끄는 할머니가 자주 나타난다. 근처 벤치 의자에는 터질 것 같은 배낭을 메고 패딩을 겹겹이 껴입은 새카만 피부의 중년 여성이 멍하니 앉아있다. 그 의자 건너 다리 밑에는 자전거 주차장을 침대 삼아 얇은 담요만 깔고 잠을 청하는 중년 남성이 있다. 그들을 보면 동정과 측은보다는 불안한 마음이 더 크다. 그들도 의지가 많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살면서 ‘폐지 줍는 사람이 될 거야!’ ‘난 노숙자가 될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인생에 고난은 예외 없이 온다. 고난에 정해진 횟수는 없다. 우리도 빈곤해지지 않으리라는 절대적인 법도 없다. 사소한 도전으로도 사소한 실수로도 인생이 역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장애를 갖지 않는 사람을 뜻하는 명칭이 ‘일반인’에서 ‘비(非)장애인’으로 변경되었다. ‘일반인’은 장애를 절대 갖지 않는다는 어감이지만, 비장애인은 다르다. 언제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박차를 가한 변화였다. 빈곤도 동일한 시선이 필요하다. 우리는 모두 ‘비(非) 빈곤자’다. 어떤 시기에 어떤 이유로 가난해질지 모른다. 그렇다고 아무 도전도 하지 않고 어떤 변화도 주지 않고 인생을 살 순 없다. 성장이 중요한 시대에 도전은 필수요소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빈곤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견해가 있다. 국가 지원이 얼마나 많은데 그거 하나 찾지도 않았냐는 이유다.

나는 빈곤이 개인의 책임일지라도 빈곤이 유지되는 것은 국가적 책임이라 말하고 싶다. 다음은 강지나의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에서 읽은 부분이다.      


저소득층이나 소외계층을 도와주는 대부분의 인프라는 종교시설, 개인 독지가에 의한 사회복지시설, 사회단체 등이 담당하고 있다. 이렇게 공공부문보다 민간부문이 많다 보니 ‘사회복지’는 보편적이고 제도적인 시스템이라기보다는 가난한 사람을 선별해서 ‘시혜적’ 시선을 담아 도와준다는 의미가 강하다.      


결국은 국가 지원의 사각지대를 개인이 채워주고 있는 셈이다. 지원정책도 행정복지센터를 집처럼 드나들고, 공무원을 귀찮게 해야만 겨우 얻거나 생성된다. 이뿐만 아니라 가난을 되풀이해야만 지원 자격이 유지되어 일을 일부러 하지 않는 가구도 있다. 당장 몇십만 원 더 번다고 해서 눈 깜빡할 사이에 가난이 지워지는 게 아닌 건 모두가 알지만, 국가는 모르는 듯하다. 이 모호한 시스템을 개인의 책임으로 치부해버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서민을 위한 다수의 정책은 더이상 안전하지 않다. 소수가 안전해야 우리도 안전할 수 있다. 그래야 도전하고 성장할 수 있다. 

작가의 이전글 구제옷을 입으면 엄마가 겹쳐보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