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은심 Jun 02. 2024

이왕이면 좋은 사람에게 배우고 싶다.

자기소개 시간이면 언제나 그 모임에서의 이미지가 고정된다. 말 많고 반응을 크게 하는 편인데 사람들은 이게 낯가리는 또 하나의 방법이란 걸 모른다. 정적은 내 책임이라는 고질병을 앓고 있다. 정적을 열심히 메꾸기 위해서 재롱은 물론 내 정보까지 과감히 드러낸다. 그러면 첫날부터 재밌고 편안한 이미지로 모임을 시작하게 된다. 소설 쓰기 수업도 마찬가지였다. 대구에서 발견한 유일한 글 수업이었다. 글 관련 모임 자체가 귀했기 때문에 고민 없이 바로 15만 원을 결제했다. 평소에 소설은 범접할 수 없는 장르였지만 가끔 수필에서도 소설적 설정이 필요할 때가 있다. 이참에 배워두고 앞으로 글 쓰는데에 오래 써먹으면 투자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 ‘수업이 끝나면 여러분은 무조건 소설 한 편을 완성하게 됩니다.’라는 문구도 마음에 들었다. 결과물이 있는 수업은 끝나도 허무하지 않다.      


퇴근하고 수업 장소까지 자전거로 20분 정도 걸렸다. 빌딩 동네를 벗어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지나고 초등학교 옆 까만 골목길에 자그마한 공간 대여 스튜디오가 수업 장소였다. 생각보다 아기자기한 장소에 더 들떴다. 시작 시각보다 조금 늦어 자전거를 급하게 주차하고 들어가자 사람들이 긴 나무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선생님은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고 프릴 원피스가 스튜디오와 잘 어울렸다. 글을 얼마나 잘 썼으면 이 스튜디오를 장만하신 걸까. 선생님이 안내한 자리에 앉았다.      


“이제 다 오셨죠? 제 소개를 할게요. 저는 초등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어요. 아, 그리고 여기는 제 소유가 아닙니다. 여기 제자 분의 스튜디오에요.”     


청바지를 입은 수수한 차림의 한 여성분이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역시 글쓰기로 큰돈을 번다는 건, 어렵구나. 선생님은 1:1 수업이 아니어서 학생들의 의견보다 자신의 의견 위주로 수업이 빠르게 진행될 수 있도록 많은 협조를 바란다고 했다. 다정함과 무심함의 경계를 오고 갔다. 학생들이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다들 담백하고 간단하게 이름과 나이, 직업, 신청 이유를 밝혔다. 내 차례가 되었다. 이번 모임에서는 차분한 이미지를 가져보자 결심했지만, 인사부터 톤을 높게 잡았다. 멜빵바지를 입고 명랑하니 본인들보다 동생이라 생각했었는지 나이를 밝히자 놀란 반응들이 쏟아졌다. 그 반응에 힘입어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출간 자랑까지 깨알같이 했다. 나도 허세가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학생들이 진심인지 아니면 ‘옜다 받아라’ 같은 반응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대단하다고 동경해주었다. 선생님은 길고 꽉 찬 나의 자기소개를 “자!”로 정리하며 다음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재밌게 읽었던 소설을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다. 곱슬머리를 한 가닥으로 묶고 기미가 인상적인 학생이 먼저 말했다. 순박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추리 소설을 좋아했다. 배경이 자취방이었던 소설이었다. 자연스레 대화가 각자의 자취방 일화로 이어졌다. 나는 4년 전에 직장을 구하면서 독립했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아무 맥락도 없이 대뜸 말했다.      


“오. 남자들이 좋아하겠네요?”      


당황해서 뇌가 잠시 멈췄다. 학생들의 대화도 멈췄다. 책에서만 읽던 여자를 성 상품화한 말이었다. 이런 저급한 문장을 읽을 때면, 상대방에게 맞서는 상상을 하곤 했다. 상상 속 상대방은 늘 남자였다. ‘방금 뭐라고 하셨죠? 이런 편협한 분에게 더는 배울 게 없네요.’ 근데 여자에게 들을 줄이야. 심지어 글쓰기 선생님에게서. 대처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분위기가 묘한 걸, 눈치를 챘는지 선생님은 예뻐서 한 말이라며 넘어갔다. 그 와중에도 ‘정적은 내 책임’ 고질병이 발병해서 웃어버렸다. 자전거를 타고 집에 오는 길 내내, 선생님이 내뱉은 말과 나의 대처에 대해서 반추했다. 화가 났었나? 아니다. 오히려 선생님이 안쓰러웠다. 그 말이 나뿐만 아니라 여성인 자신도 깎아내렸다는 사실을 모르다니. 대뜸 없는 말에 대뜸 화를 냈다면 분위기를 망친 책임감이 나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최선의 대처를 했다고 결론 내렸다.      


다만, 그 날의 수업이 처음이자 마지막 참여였다. 나에게 글쓰기는 먹고 사는 수단을 초월한 무언가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책을 읽으면 자연스레, 작가님의 관심사를 따라가게 된다. 기후위기와 비건, 여성, 장애인의 키워드가 그러하듯. 나도 새로운 영감을 주는 글을 쓰고 싶다. 그래서 이왕이면, 글쓰기만큼은 좋은 사람에게 배우고 싶었다. 좋은 영향이 내리흘러갈 수 있도록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쓰레기를 밟고 선 나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