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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하마 Jan 20. 2024

병보다 사람

누구를 위한 의료인가

오늘은 본업에 입각한 이야기를 살짝 해볼까 합니다.

저는 의료의 사회적 발전을 꾀하는 기관의 의료 학술팀에서 남이 제출한 논문 내 데이터의 정확성을 확인하고, 원고의 교정을 완성하는 일을 합니다. 저희 학술지로 제출되는 논문들의 다수가 임상 시험에 대한 논문이다 보니 특정 질환을 가진 인구를 언급하는 일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A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폐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럼 이 사람을 지칭할 때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보기를 드리겠습니다.


1. 폐암 환자 (Lung cancer patient[s])

2. 폐암을 가지고 살아가는 환자/사람 (Patient[s]/person/people with lung cancer)


언뜻 보기에 비슷한 것 같지만 차이를 알려드리자면, 1번은 사람보다 질환에 집중된 (disease-centred) 표현입니다. 반면 2번은 질환보다 사람을 우선시하는 (person-first)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정해진 답은 없습니다. 다만 권고 사항이 있을 뿐이죠.




의료 학술지에서 상당히 높은 권위를 자랑하는 란셋 (The Lancet)은 의료에 있어 질병이 아닌 환자가 그리고 사람이 우선되어야 함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1번과 같이 질환을 강조하는 표현은 대상을 특정 질환과 동일시하여 화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대상에게 오명 stigma과 비난을 씌울 수 있기 때문에 추천하지 않습니다. 위에 언급했던 예시로 돌아가봅시다. A가 '폐암 환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많은 분들의 머릿속엔 저절로 이런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담배를 많이 피웠나 보네, 그러니 폐암에 걸리지.'


미국 통제 예방 센터 Center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에 따르면 흡연이 폐암을 일으키는 원인 중 단연 1순위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살면서 한 번도 입에 담배를 대어보지 않은 사람 또한 간접흡연, 작업장에서의 유해물질, 가족력 등의 이유로  폐암에 걸릴 가능성이 분명 존재합니다. 따라서 '폐암 환자'라는 지칭은 폐암 진단을 받은 대상 다수를 일반화시켜 '담배를 피웠으니 폐암 걸린 건 어쩔 수 없지'등과 같은 오명을 씌우는 경향을 띄고 있기 때문에 권장되지 않습니다. '자업자득이야'식의 환자에 대한 공감과 존중이 결여된 시선은 환자나 가족에게 우울이나 불안과 같은 정서적인 스트레스로 작용하여 치료에 대한 적극적 참여 의지를 낮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2번과 같이 '(질환)을 가지고 살아가는 환자'는 질환보다 모든 상황의 주체가 되는 사람에 집중합니다. 의료란 그저 병을 없애기 위한 도구가 아닌 '사람'을 위한 것임을 강조하며 특정 질환에 대한 비난의 어조를 걷어내어 그 질환과 연관되어 발생하는 차별을 저해하고 의료진과 대상 사이의 신뢰를 높이는 것이죠.




저희 기관도 란셋과 의견을 같이하여 모든 논문 내에 'patient with (질환명)'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저자가 'cancer patient'와 같은 식으로 표현하는 경우 제가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뒤져가며 위와 같이 다 수정합니다. 휴우...) 아마 논문 업무를 담당하지 않았다면 평생 모르고 지나갈 의료 사회의 측면이었을 겁니다. (세상 어딘가엔 이런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시절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환자들의 당장의 고통에 집중하느라 차마 신경 쓰지 못했던 점들이 많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코드 블루가 터지는 정신없는 임상에서 팀원들과 직관적으로 정확하게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편의 상 'alcoholic patient', 'diabetic patient' 등으로 환자를 지칭했는데 그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환자 분들을 생각하니 늦었지만 죄송할 따름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통해 많은 분들이 의료의 생경한 부분에 대해 짧게나마 고민하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 계기를 통해 '사람'을 위한 의료로 발전시켜 가는 길에 모두 함께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 위에 적은 내용은 함께 일하는 특정 의료분야의 key opinion leaders로부터 전해 들은 의료 사회의 트렌드 와과 다음의 출처를 바탕을 작성되었습니다. 혹시라도 더 깊이 있는 설명을 원하시는 분들을 위해 링크를 남깁니다.


The Lancet: https://www.thelancet.com/journals/lanonc/article/PIIS1470-2045(23) 00465-5/fulltext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https://www.cdc.gov/cancer/lung/basic_info/risk_factors.htm


(커버 이미지: Wikipedia - 'The Creation of Adam' by Michelangel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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