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백과사전 중 '친구'라는 단어에 의미 한 줄 추가하기
나는 만 39세이다. 지금 쓰는 연락처는 만 19세 때부터 사용하던 거니까 약 20년이 됐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 연락처에 저장되어 있는 중학교 동창이 있다. 아주 가끔 카톡 프로필의 사진을 보고 이 연락처가 그 친구의 번호가 맞음을 확인하는 것 외에는 그것은 나에게 있어 언제 지워져도 이상하지 않은 연락처였다.
지난 금요일, 카카오톡 생일인 친구목록에 있는 그 프로필이 눈에 들어왔다. 일찍 일어나 기분 좋게 산책을 한 탓인지, 돌아오는 산책길에 '안녕! ㅇㅇ중학교 나온 ㅁㅁ 맞지?'라고 내가 누군지 밝히지도 않는 예의 없는 문자를 남겼다. 약 한 시간 후 돌아온 답변이 놀라웠다. '응 맞아! 혹시...@@@이니? 이름보니 기억이 나는데 ㅎㅎ'. 사실 나는 정보유출의 시대에 모르는 사람이 나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이 싫어서 카톡 프로필 이름도 성을 뺀 상태였다. 그런데 나의 예의 없는 메시지 하나에 나의 성까지 기억하며 나를 기억해 주다니. 놀라웠다.
짧은 몇 마디 안부 후 종종 소식 전하자는 말로 대화는 끝났다. 굳이 갑자기 가까워질 필요가 없는 사이. 하지만 가는 실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친구와는 중학교 졸업한 후에 실제 얼굴을 마주한 적이 있었는지도 기억이 가물하다. 아마 저장되어 있는 연락처도 대학시절에 싸이월드 같은 매체를 통해 주고받았을 것이다. 만난 기억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꽤 오래 기억하고 있다. 중학교 시절 체육 조별활동 후 귀가하는 길에 그 친구가 들어간 아파트의 위치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우리는 그 작은 시절의 서로를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게 우리의 사이이고, 그 기억이 우리가 서로를 거리낌 없이 친구라고 부를 수 있게 만드는 것 같다.
성인이 된 후, 대학에서, 군대에서, 회사에서 오래 함께 지낸 사이인데도 그 사람에게 '친구'라는 단어를 붙이기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실제 얼굴을 본 지 20년이 넘은 기억 속 중학교 동창에게 친구라는 단어를 붙이는 건 어쩜 이리도 쉬운지.
우리가 다시 연락을 하고, 약속을 잡고 만날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더 시간이 흘러 서로의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큰 일을 치를 때도 우린 아마 서로를 찾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 시절을 함께한 기억으로, 그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는, 적어도 나는 그녀를 친구라고 생각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