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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소년 7시간전

2-3 초록 사구

20코스(하도~김녕) 2

 20코스는 크게 두 종류의 길로 나눌 수 있다. 세화포구에서 제주밭담 테마공원까지는 마을, 밭 그리고 숲을 지나는 내륙길이 주를 이룬다. 해안 길도 있지만 짧았고, 고래가 호흡을 위해 잠시 수면 위로 오르듯 내륙길이 숨을 고르기 위해 잠깐 지나는 길 같았다. 제주밭담 테마공원부터 김녕서포구까지는 해안 길이다.      


 세화포구를 지나면 마을이 나오고, 마을을 지나면 길가에 풀들이 웃자란 언덕과 밭들 그리고 벌판이 펼쳐진 공간이 나온다. 이 공간을 지나는 길이 ‘벵듸 길’이다. 작은 간세가 알려주었다. 지명과 잘 어울리는 길이었다.     

평대 마을은 벵듸또는 벵디라고 불렸다. 돌과 잡풀이 우거진 넓은 들판을 뜻하는 제주어이다.‘벵듸 길은 마을의 유래를 짐작하게 하는 옛길이다.     


<벵듸 길, 색상은 초록이다. 상단의 중앙은 세화의 특산물인 초록의 당근밭이>

 ‘벵듸 길’은 초록이었다. 길가의 나무와 풀 들 그리고 밭에 심어진 작물들은 초록이었다. 특히 세화의 특산물인 당근의 잎들은 너무 또렷해서 맑은 초록이었다. ‘벵듸 길’에 이어진 마을 길에서 생각지도 않게 핑크뮬리를 만났다. 초록의 세상에서 만난 분홍색에 눈길이 가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분홍색은 강렬한 느낌이었다. 아마 분홍색의 보색이 초록이라서 그런 것 같다. 보색은 두 빛이 섞이면 무채색이 되는 서로 반대되는 색이다. 그만큼 두 색의 대비는 강한 느낌을 준다. 초록의 세상이 아니었다면 핑크뮬리의 분홍은 부드럽게 다가왔을 것이다. 초록이 펼쳐진 곳이기에 핑크뮬리는 짙게 도드라졌다.     


<초록의 세상에서 만난 핑크뮬리>


 내륙이라도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의 영향을 피하진 못했다. 강한 해풍이 내륙 깊숙이 불어왔다. 특히 마을 길은 해풍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강풍에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휘날리지 않도록 모자를 썼다. 그런데 이번엔 모자가 날아가지 않도록 손으로 모자를 붙잡아야 했다. 그래서 앞을 볼 수 없었다. 이것 때문에 여러 번 코스를 이탈했다. 20코스의 내륙 길은 긴 횡의 길 끝에 짧은 종의 길이 이어지고, 다시 꺾여 긴 횡의 길로 들어선다. 그래서 짧은 종의 길에서 부주의하면 코스에서 벗어나게 된다. 나는 여기서 여러 번 길을 잃어 되돌아가길 반복했다. 짜증이 났다. 그리고 짧게 걸린다고 했으나 거의 10분간 통화한 직무교육에 대한 설문조사 전화는 짜증을 배가시켰다. 이런 짜증을 잠재운 순간이 갑자기 찾아왔다.     


<20코스는 짧은 종의 길들(원안)이 있어 부주의하면 코스를 이탈할 수 있다>


 ‘벵듸 길’을 지나 평대리 해수욕장을 거쳐, 한동리 해안도로에 있는 아일랜드 라운지 앞이었다. 잦은 코스 이탈과 설문조사로 인하여 짜증이 몹시 난 상태에서, 바람에 모자가 날아가지 않도록 모자를 잡고 고개를 숙이며 정신없이 이곳을 지나고 있었다. 갑자기 산탄같이 넓게 퍼진 물 폭탄이 나를 강타했다. 성난 파도가 도로의 돌난간과 강하게 부딪쳐 부서지며 만들어낸 거대한 하얀 포말이 도로를 넘어 나를 덮친 것이다. 바닷물에 홀딱 젖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앞을 걷던 두 명의 여성도 마찬가지였다. 혀로 입술을 핥으니 짠맛이 났다. 이 물보라로 인해 짜증이 더 배가 될 수 있었는데 이상하게 짜증이 사라졌다. 물 폭탄은 '짜증은 너만 힘들게 할 뿐이니 흘러버리고 그냥 걸으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았다.      


<좌: 물 폭탄 맞은 한동리 해안도로 / 우: 초록의 해초로 덮인 평대리 해수욕장>

 물 폭탄 이후로 마음을 가다듬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걸었다. 옷은 신경 쓰지 않았다. 걷다 보면 마르겠지 생각했다. 길은 밭과 나무들이 있는 숲길이었다. 길은 좌가연대에서 거의 170도 각도로 급격히 꺾였다. 꺾이는 꼭짓점에 있는 좌가연대는 현무암으로 쌓아 올린 육면체로, 정면에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좌가연대에 대한 안내문을 읽고 연대와 봉수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사용된 군사·통신시설로 봉수와 연대가 있다. 조선시대의 읍지류에 따르면, 제주도 내에는 봉수대 25개소와 연대 38개소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체로 봉수대는 오름(측화산)의 정상에 세우고, 연대는 해안의 구릉지에 세웠다. 돌로 쌓은 연대의 높이와 너비는 각각 10척 내외였다. 연대는 적선의 동태를 관찰하는 동시에 해안 변경을 감시하는 연변봉수의 기능을 수행했다. ... 비가 오거나 구름이 끼어 불이나 연기를 피울 수 없으면 연군이 달려가 상응하는 연대에 전하는 동시에 가까이 있는 봉수에도 연락을 취했다.

 

<좌가연대>

 봉수는 오름에, 연대는 해안 구릉에 세워진 군사·통신 시설이었다. 3코스 초반에 이름만 있었던 연듸모루(연대언덕)도 해안가에 있었던 이유를 이해했다. 당시에는 봉수면 높은 곳에 있어야 하는데 너무 낮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봉수와 연대는 구별되었던 것이고 기능도 조금은 달랐다.  

    

 좌가연대에서 급히 꺾인 길을 걸으면 두 가지가 눈에 띈다. 하나는 풍력발전기이고 다른 하나는 작은 표지목들이다. 풍력발전기는 좌가연대 이전부터 우뚝 솟은 기둥과 함께 거대한 날개가 나무들 위로 보였다. 그리고 좌가연대에서 조금 더 걸으면 그 거대한 실체를 고개를 들어 볼 수 있다. 풍력발전기 근처에 다가가면 ‘웅웅’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 소리라고 생각했다. 사실 해풍은 지상의 많은 소리를 지웠다. 특히 저번 올레에서 어디서나 들었던 새소리가 사라졌다. 새들은 해풍을 피해 더 깊은 내륙으로 날아간 것 같았다. 바람은 자신이 소리를 만들어 소리의 공백을 메웠다. 그것은 바람이 공간을 가로지르며 내는 ‘쏴쏴’ 소리이거나 나무들을 비정하게 흔들며 내는 ‘쉬쉬’ 소리였다. 그런데 숲길로 들어서면서 갑자기 소리가 사라졌다. 진공의 공간처럼 어떤 소리도 없었다. 묘한 느낌이 들었다. 바람도 소리를 만들지 못하지만, 일상의 다른 소리도 입국을 허락하지 않은 모든 소리를 거부하는 중립국 같았다. 그러나 얼마쯤 걸으니, 소리가 서서히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바람 소리라 생각했다. 바람이 숲의 꼭대기를 흩고 지나가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세히 들으니 ‘쉬쉬’하는 바람 소리하고는 미세하게 달랐다. ‘웅웅’으로 들렸다. 더 걸으니, 소리는 커지기보단 무거워져 가는 느낌이었다. 바람이 내는 조금은 가벼운 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소리였다. 고개를 드니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보였고, 그곳에 다가갈수록 소리는‘웅웅’에 무게를 더한 것처럼 더 무거운 소리가 났다. 거대한 풍력발전기의 프로펠러가 힘겹게 돌아가는 소리였다. 이것도 바람이 돌리는 것이지만 소리는 바람이 아니라 프로펠러가 공간을 가르며 내는 소리였다. 묵직한 인공적인 소리였다. 풍력발전기는 19코스 동복리 마을 운동장에 가는 산길에서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프로펠러가 돌아가면 어김없이 웅웅 소리가 났다.  

<풍력발전기 / 이번 올레를 걷는 내내 해상과 내륙에서 많이 볼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나무로 만든 작은 표지목인데 위에 있는 파란색 판에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것은 19코스 중간스탬프가 있는 동복리 마을 운동장에 이르는 산길 곳곳에도 있었다. 주로 숲길이나 산길에 있다. 글귀는 박노해 시인의 <걷는 독서>라는 책에서 가져왔다. 이곳에는 세 개가 있었다. 서둘지 마라. 그러나 쉬지도 마라. 위대한 것은 다 자신만의 때가 있으니 / 쉼표가 없는 악보는 노래가 될 수 없다. 내 삶에 푸른 쉼표를 / 마음이 사무치면 꽃이 된다. 나머지 대부분은 19코스에 있다. 글을 음미하며 천천히 걸으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그러나 난 한 번 쓱 읽고 지나갔다. 내 마음이 급했다. 너무 긴 코스를 연달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과연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쉼표가 없는 악보는 노래가 될 수 없다. 내 삶에 푸른 쉼표를이라는 글귀가 마음에 계속 남았다. 이렇게 전투적으로 걷는 것이 옳은 것일까? 계속 자문하며 걸었다. 올레의 취지에 어울리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걷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19, 20 코스에만 있는 것 같은 표지목>


 중간스탬프가 있는 행원포구까지 숲과 밭의 긴 길이 그리고 짧은 마을 길이 이어졌다. 마을 길은 해안 도로와 만나 행원포구로 곧장 가지 않고 바닷가 길을 돌아 행원포구에 닿았다. 도로에서 카페가 있는 길로 빠져 바닷가로 걸어가면 쓸쓸한 초록의 사구와 만난다. 그 너머로 여전히 파도를 몰고 오는 회색의 바다가 보인다. 이 풍경은 왠지 익숙하다. 어떤 영화의 엔딩이 떠올랐다. 독일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였다. 두 남자가 초록의 사구 사이로 난 길을 걷고 있는 장면이다. 골수암 말기의 루디와 뇌종양 진단을 받은 마틴은 같은 병실에 입원하고, 단 한 번도 바다를 보지 못한 루디를 위해 마틴은 그와 함께 병원에서 탈출한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바다에서 둘은 바다를 보고, 마틴은 루디 곁에서 쓰러져 죽는다. 강풀 작가의 ‘당신의 모든 순간’에서도 좀비의 세상에서 주광철은 바다를 보고 싶어 하는 부인 홍술녀를 휠체어에 태우고 걸어서 바다로 향한다. 화진 해수욕장에 도착한 그들은 그대로 바다로 들어간다. 생의 마지막을 위해 이들은 왜 바다로 갔을까?

<좌 : 초록의 사구 / 우 :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 엔딩장면(영화챕쳐)>
<영화 포스터 네이버 영화 참조>

 바다는 생명의 기원이다. 육상 동물은 바다에서 왔다. 다시 바다로 간 고래도 있지만, 동물 대부분은 바다에 살았던 동물을 공통 조상으로 하고 있다. 그건 인간인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엄마 배 속에서 물로 채워진 양수에서 생활한다. 양수는 성분과 염도에서 바닷물과 비슷하다. 우리는 작은 바다에서 생을 시작한 것이다. 바다는 우리에게도 근원이다. 그래서 생의 마지막에 생명의 근원인 바다를 본능적으로 보고 느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사실 생을 마친 육체는 흙에서 물리적, 화학적 변화를 통해 일부는 땅속으로 침윤하고 일부는 산소화합물, 수소화합물 또는 재나 먼지가 되어 대기로 날아간다. 이 중 일부는 수증기와 결합하여 구름의 응결핵이 되고, 결국엔 비로, 눈으로 내려 물이 되기도 한다. 인간은 흙에서 나서 흙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물에서 나와 흙을 거쳐 물로 회귀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바다에 끌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 여행의 종착점은 출발 장소에 도착했을 때다.

                                                                     T.S 엘리엇

 (2024.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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