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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속도

4코스(표선→남원) 3

by 커피소년

해비치 리조트 앞을 지나는 해안도로는 깔끔했다. 그 깔끔함에서 인공적인 냄새가 났다. 인공적인 것을 의식한 것일까? 올레길은 얼마 못 가 해안도로를 벗어나 바닷가로 방향을 틀어 도로 옆, 숲으로 들어갔다. 가장자리를 가지런히 베고 남은 부스러기 종이-국지처럼 해안도로로 인해 본래의 땅에서 잘려 나온 숲이었다. 나무 가지들이 서로를 향해 뻗으면 작은 터널이 만들어졌다 서로 멀어지면 하늘이 보였다. 엷은 갈색 고양이 한 마리가 길을 막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진을 찍는 동안 피사체가 된 자신이 싫은 듯 획 사라졌다. 길은 숲에서 바닷가로 내려가 바다와 숲을 구분하려는 듯 횡으로 가르며 나아갔다. 노란 꽃이 초록의 풀 사이에 피었다. 검색해 보니 69%의 확률로 ‘서양민들레’였다. 그 사이, 외국인 한 명이 ‘hello’하고 지나갔다. 나도 작은 소리로 ‘hello’ 했다. 걸으며 스칠 때 서로에게 하는 이런 인사말이 여전히 낯설고 서툴다. 잠시 후 다른 한 남자가 또 바삐 지나갔다. 망대에 접근했던 그들이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멈춤이 잦다 보니 어느새 그들에게 따라 잡힌 것이다. 해안 길에서 나와 해안도로에 다시 섰다.

<해비치 리조트 앞 해안도로>
<숲 길에서 스친 고양이와 외국인>
< 69% 확률로 서양민들레>

해안도로는 곡선을 그리며 얕게 오르다 언덕을 넘어 사라졌다. 젊은 외국인은 벌써 언덕을 넘어가고 있었고 또 다른 남자는 외국인과 나 사이 중간쯤에 있었다. 다들 경주하듯 바삐 걸었다. 그들은 정말 길만 보고 걸고 있었다. 저 정도 속도면 저녁 전까지 두 코스는 거뜬히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러닝을 하다 보면 나를 앞질러 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따라잡으려 속도를 높이다 보면 오버페이스가 되어 금세 지쳐 포기하게 된다. 그들의 속도를 생각하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걷기로 했다.


<언덕에 젊은 외국인이 보인다>

낮은 언덕에 덩그러니 집 한 채가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집이 있던 야트막한 언덕에서 뒤를 돌아봤다. 지나온 숲이 눈에 들어왔다. 숲의 초록과 현무암의 검정 그리고 반짝이는 윤슬의 바다-그 엷은 푸름, 색의 세상은 평연했다. 언덕의 집은 동하동 해녀식당이었다. 식당 이름이 하얀 페인트로 엉성하고 서툴게 바위에 쓰여있어 참 성의 없다고 생각했다. 시멘트를 바른 주차장 같은 넓은 공간 때문에 식당은 상대적으로 작고 초라해 보였다. 사람들이 올까? 사람들을 끌어들만한 매력이 그다지 없어 보였다. 그래서인지 식당보다 앞서가는 남자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본다. 식당에 들어가 자리잡고 창밖을 보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비늘 가득한 바다 풍경은 오롯이 나만의 것은 아니였는지. 이것이 이 식당의 매력일지도 모른다.


<좌 : 언덕에 홀로 있는 식당 / 우: 뒤돌아본 풍경>
<좌 : 바위에 쓰인 식당 이름(사진, 카카오맵 참조) / 우 : 앞서간 남자>

길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나지막이 내려갔다. 나팔꽃 같은 엷은 분홍의 갯메꽃, 초록의 클로버들 사이에서 하얗게 핀 토끼풀 그리고 하얀색에서 분홍으로 물들어가는 꽃잎을 가진 갯무꽃. 길가에 핀 꽃들을 보다 보니 멈춤이 잦아 내 앞의 그와 점점 멀어졌다. 이러다 오늘 두 코스를 걷지 못할 것 같은 서늘한 느낌이 마음을 훑고 지나갔다. 호기심을 자제하고 걸었다. 뭍으로 살짝 들어간 곳에 물길이 바다로 나가지 못하고 갇혀 있었다. 수면 곳곳에 떠 있는 초록의 물이끼가 또는 해초가 보였다. 갯늪이었다. 간세는 갯늪을 ‘표선 서남쪽 해안 갯가에 있는 습지로, 태우도 맬 수 있었던 넓은 늪’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바닷가에 늪이라니. 신기하기만 했다.

바닷가에 넓게 펼쳐진 현무암들로 인해 밀물로 들어온 바닷물이 갇혀 습지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저 끝에 있는, 바다와의 만남을 막는 돌들이 없어져도 여전히 늪이 유지될지 궁금했다.

<앞서 가는 그와 평로운 풍경>
<좌 : 갯메꽃 / 우 : 토끼풀>
<조 : 갯무꽃 / 우 : 갯늪>

궁금증을 뒤로하고 걸었다. 작은 쉼터 같은 곳에 시비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표선 출신인 송강 시인의 시였다. ‘기억 너머의 귀영구석’, 지나는 길을 통해 지워진 옛 시절을 추억하고 있다.

‘곧은길은 귀영구석 길이 아니다/ 갯바위로 에두른 올레길을 밟으면서/ 우리들 삶이 닮아온 것이다/ 낯선 사람들이 굽어 간 길목마다/ 바람은 누이 손톱 같은 갯찔레꽃을/ 환장하게 피워내는데/ 우리들의 얼굴을 닮았던 길은/ 기억의 방에서 하얗게 비워지고 있다/ 누가 귀영구석 길을 허물어 왔을까/ 뭍이 그리운 밀물도 발길을 돌리고 있다/ 돌담으로 경계 그은 신작로 길섶에/ 면직원이 뿌려 놓은 유채꽃들이/ 당포를 향해 목을 빼들고/ 화르르 화르르/ 우울증을 털어내고 있다’


‘귀영구석’, 너무도 궁금증을 자아내는 단어였다. 한자어인지, 순우리말인지 아니면 ‘귀영’이라는 한자어와 ‘구석’이라는 순우리말의 조합인지 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검색했으나 더 이상의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문맥상, 이곳 마을 이름인 것 같았다. 시비 근처에 낡은 안내판이 보였다. ‘황근 자생지 복원’, 황근은 처음 들어본 단어였다. 자세히 읽어보니 황근은 무궁화였다. ‘황근은 유일하게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무궁화로 7~8월에 노란 꽃이 피며 제주도 해안가 일부에 자생하고 있는 멸종위기 식물’이고 그래서 멸종위기 야생식물Ⅱ급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이곳이 환경부 국립생물자원관에서 황근을 기증받아 복원한 곳이었다. 어딜까? 길에서 벗어나 찾았다. 안내판 뒤에 캠핑카 한 대가 주차해 있고 여러 개의 캠핑 의자가 놓여 있었다. 사람이 안에 있는 것 같아 조심하며 걸었다. 듬성듬성 머리가 자란 듯한 둥근 초록을 배경으로 가지들이 삐죽삐죽 올라온 이것일까? 좀 더 들어갔다. 어지러운 회색 가지들에 초록 잎들이 피어 있는 군락이 보였다. 가지에 붙어 있는 코팅된 하얀 표식에 황근이라고 쓰여있었다. 황근 군락은 그렇게 넓지 않았다. 7~8월에 꽃이 피니 지금 초록 잎을 먼저 피워내 꽃 필 준비를 하나 보다. 황근을 검색했다. 노란색이 너무 이뻤다. 꽃잎 하나하나가 노란 유자 샤베트를 살짝 긁을 때 가늘고 둥글게 말린 모습과 닮았다. 유자 샤베트가 연상되어서 그런지 시원해 보였다. 여름에 보면 잠시 더위를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쉬웠다. 지금 못 봐서 그리고 어디서나 볼 수 없어서. 잘 자라 보호종에 벗어나 어디서나 볼 수 있길 바랐다.

<좌 : 송강 시인의 시비 / 우 : 황근 안내판>
<좌 : 이름을 알지 못한 나무 / 우 : 황근 군락>
<황근 / 출처: 국립공원공단>

아쉬움을 남기고 다시 걸었다. 열린 호 안의 에메랄드빛 바다가 보였다. 여러 사람이 검은 현무암 해변에서 갈색인 무언가를 줍고 있었다. 쓰레기인가 하고 지나갔다. 에메랄드빛 호를 지나면 길은 도로에서 해변으로 꺾여 해변 길로 변했다. 모래밭 위에 검은 현무암들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길을 안내했다. 해안 쪽으로 초록 풀과 녹 슨 것 같은 갈색 풀이 검은 현무암 위에 흩트려져 있었다. 그들이 주었던 것이 저것이었나? 발밑으로 다가온 바다를 봤다. 물이 너무 맑았다. 살랑살랑 물결칠 때마다 햇빛은 물결의 골과 마루를 따르며 물결을 은은히 조각냈다. 작은 간세가 서 있는 직사각형의 파란 프레임이 있는 곳에서 길은 해안 도로와 다시 만났다. 포토존이었다. 버려진 플라스틱을 이용하여 만든 의자가 둥글게 놓여 있었다. 프레임에 내 흔적을 남기지 않고 지나쳤다.

<좌 : 에메랄드 바다 / 중앙 : 해안 길 / 우 : 해안 길에서 본 바다 풍경>
<좌 ; 햇빛에 갈라진 수면 / 우 : 포토존>

해안도로를 걸었다. 걷는 것 말고 할 것 없는 올레다. 그래서인지 길에 조금 특이한 것이 나와도 눈길이 갔다. 해안 쪽 길가에 둥근 초록의 잎들 속에서 팝콘처럼 단단하고 하얗게 핀 꽃들이 보였다. 다정큼나무꽃이었다. ‘다정’이 크다는 의미일까? 열매가 옹기종기 열린다고 하여 다정큼나무라고 불린다고 한다. 비슷하게 맞췄다. 한 그루의 다정큼나무꽃을 지나니 바로 해양수산연구원이었다. 해양수산연구원은 길의 바다 쪽에 있었다. 이전까지의 길은 바다 쪽에 건물이 없어 개방감이 컸다. 끝없이 바다를 볼 수 있었다. 보지 않으려고 해도 질리도록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해양수산연구원을 지나는 길은 양쪽에 건물이 있어 시야를 막아 통과하고 있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해양수산연구원 맞은편에 검은 비닐지붕의 건물들이 있었다. 해안 올레를 걸을 때면 종종 보는 건물이었다. 그 건물과 연결된 것 같은, 해변으로 나온 관에서 콸콸 쏟아져 나오는 물을 보곤 했다. 물은 맑았지만 그래도 걱정은 되었다. 그 물의 정체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양수산연구원 맞은편에 있는 회사명을 보고 알게 되었다. ‘롯데마트 제주광어 지정양식장’ 검은 비닐지붕의 건물은 양식장이었다. 관의 물은 양식장에서 흘러나온 물이었다. 양식장은 바닷물을 끌어들여 양식장에서 사용하고 다시 바다로 배출했다. 이런 순환 과정에서 양식된 물고기들이 먹다 남긴 찌꺼기와 그들의 배설물 그리고 수조를 청소할 때 사용하는 포름알데히드가 바다로 흘러들기 때문에 바다의 과영양화와 오염이 우려된다고 한다. 인간이 욕망을 지니고 자연에 끼어들면 자연은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여기서도 확인하게 된다. 그럼에도 걱정이 단순한 기우이길 바랐다.


< 좌 : 다정큼나무꽃 / 우 : 양식장(사진 : 카카오맵)>
< 역방향에서 걸어온 순례자>

한 남자 지나갔다. 그는 역방향으로 걸어왔다. 갑자기 앞서 걷던 남자가 생각났다. 벌써 시야에서 사라졌다. 거리가 많이 벌어졌다.

(2025.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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