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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연상

4코스(표선→남원) 6

by 커피소년

황해루에서 점심을 해결하는 동안 일몰시간을 확인했다. 19시 30분. 일몰 전까진 도착해야 했다. 19코스 함덕과 조천 사이를 암흑 속에서 걸었던 불안의 경험이 트라우마처럼 강하게 마음에 남아있다. 두려웠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13시 08분. 대략 6시간 30분 정도 남았다. 이 시간 동안 4코스 나머지와 5코스를 완주할 수 있을지 살짝 자신이 없어졌다. 옆에 있는 편의점에서 물과 에너지바 몇 개를 사고 편의점 커피를 들고 나와 파라솔에 앉아 마셨다. 마지막 휴식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일어나서 걸었다. 13시 20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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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바닷가로 가 태신해안도로를 만나 태흥2리포구에서 이름을 바꾼 남태해안도로를 따라 남원 포구까지 이어졌다. 대부분이 해안도로였고 한번 도로를 벗어나 바닷가에서 쉬며 되돌아갔다. 올레길이 태신해안도로와 만난 곳에 올레 화살표가 서 있었다. 화강암으로 쌓아 올린 가드레일에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는 파랑과 주황색의 엇갈린 화살표는 왠지 외로워 보였다. 무한히 펼쳐진 곳에 점 같은 뭔가가 홀로 있으면 외로움이 짙게 전해져 온다. 외로움은 파랑에 더 몰렸나 보다. 파랑 화살표는 유치환 시인의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向)하야 흔드는’ ‘깃발’ 같았다. 바다를 향한 그리움이 외로움으로 응결되어 파란 화살표가 되었다. 어쿠스틱 콜라보의 ‘묘해, 너와’를 잠시 흥얼거렸다. ‘참 묘한 일이야 사랑은 / 좋아서 그립고 / 그리워서 외로워져’ 파란 외로움은 신흥리 포구를 가리켰다. 사람 없던 신흥리 포구를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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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살표와 신흥리 포구 사이>

길이 포구 옆면을 지날 때 신흥 1리 표지석이 보였다. 빨간 글씨가 눈에 띄었다. 중간 스탬프가 있던 알토산고팡 옆에 있던 충혼비 글씨도 빨간색이었다. 대부분은 흰색인데 독특했지만 갑갑했다. 아마 검은 암석의 빨강이 두드러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검은 암석에 갇혀 있는 느낌 때문이었다. 왜 글씨를 빨간색으로 했을까? 표지석 뒤에 길게 뻗은 방파제 그리고 끝에 있은 하얀 등대가 갑갑함을 가시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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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 1리 표지석과 등대>


덕돌 포구까지, 양식장이 오른쪽 풍경의 주를 이뤘고 양식장에서 흘려보내는 물이 바다로 쉴 새 없이 흘러 들어갔다. 산긋불턱이 보였다. 내부의 공간을 상하로 나누는 일반적인 불턱과는 다르게 큰 불턱과 작은 불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는 제주도 집의 안거리와 밖거리를 연상시킨다고 한다. 길은 바다를 향해 완만히 돌았다. 바다로 향한 곳에 돌하르방이 노란 컵을 들고 있었다. 노란 색감에 눈이 갔다. 커피잔일까? 멀리 바다에 찌 같은 부표가 서 있었다. 오른쪽으로 하얀 등대도 보였다. 부표와 등대 사이 작은 바위에서 파도는 흰 거품으로 부서졌다. 저것이 ‘검은여’일까? ‘여’는 썰물일 때 드러나고 밀물일 때 물에 잠기는 바위를 말한다. 지금이 밀물 때인지 썰물 때인지 모르지만 바닷물이 더 차면 확실히 잠길 것 같았다. 부표, 작은 바위, 등대의 풍경을 보니 직관적으로 정현종 시인의 ‘섬’이 떠올랐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 그 섬에 가고 싶다’ 바다로 열려있어 개방적이면서 바다로 인해 나아가지 못해 폐쇄적인 이중성의 섬이 고립과 개방이라는 사람의 관계를 형상화한 것은 아닌지. 또 박후기 시인의 ‘격렬비열도’도 따라 올라왔다. ‘격렬과/ 비열 사이// 그/ 어딘가에/ 사랑은 있다’ 극단에 있는, 모든 것을 불사르는 격렬한 사랑과 개인적 욕망의 충족만 생각하는 비열한 사랑 사이에 있는 모든 사랑의 스펙트럼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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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 사진 : 양식장에서 나온 물이 바다로 흘러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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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긋불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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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 시 '섬'이 떠올랐다>

덕돌 포구에 가까워지니 집들이 보였다. 파랑과 노랑이 주를 이룬 집, 지나고 보니 커피도 파는 게스트하우스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 노란 건물이 또 눈길을 끌었다. 모카다방이었다. 커다란 노란 서핑보드에 맥심모카골드 CF촬영이라고 쓰여있었다. 커피광고에 나온 곳인가 보다. 좀 전의 돌하르방의 노란 컵은 여기하고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냥 지나쳤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여기는 무척 유명한 곳이었다. CF를 찾아서 봤다. 김우빈이 나온 광고였고, 오픈 편에는 황정민도 등장한다. 황금빛으로 물든 바다 풍경과 맥심의 노란색이 너무도 환상적으로 조화된 광고였다. CG작업으로 만든 풍경이 아니라면 저런 부드러운 황금빛에 물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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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카다방이 배경인 맥심광고 / 출처 : 유트브 맥심광고에서 캡처>

덕돌 포구에 숨비소리라는 이름의 불턱이었다. 숨비소리? 그것은 해녀가 잠수했다가 물에 떠오를 때 숨을 내뱉는 소리로 휘파람 소리처럼 삐익하고 높은 소리가 난다고 한다. 마을 쪽으론 천연잔디 축구장이었다. 그러나 관리가 안 되었는지 잔디가 풀로 자라고 있었다. 축구를 좋아하는 나에겐 매우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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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돌포구 주변과 숨비소리불턱>

덕돌 포구에서 태흥2리 포구까지 거리는 짧았다. 두 가지가 인상 깊었다. 폐업된 듯한 양식장의 건물이었다. 어떤 감정이 느껴졌다. 쓸모 다한 것들의 쓸쓸함이었다. 사진 찍기에 좋은 피사체였다. 또 다른 하나는 강아지를 데리고 걷고 있는 여성이었다. 설마 올레를 강아지와 함께 하는 건 아니겠지?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나온 것이겠지. 그러나 단단히 준비하고 온 옷차림이라 올레길 위에 있는 듯했고 4코스면 충분히 강아지와 가능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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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흥2리 포구였다. 다른 포구와 다를 것이 없었으나, 단 하나 옥돔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달랐다. 옥돔 조형물 밑엔 옥돔 마을이라고 쓰여있었다. 이곳은 옥돔이 유명한가 보다. 그래서일까? 태흥2리 포구에는 옥돔경매장이 있다. 이곳은 새벽이 아닌 평일 오후 1시에 경매가 열리고 이곳에서 구입한 옥돔으로 요리하는 식당도 있다고 한다. 포구 위쪽에 인조잔디 축구장이 있었다. 햇볕에 그을린 중년의 한 남자가 열심히 슛 연습을 하고 있었다. 저것이 얼마나 지루한지 잘 알고 있다. 운동은 폼이다. 좋은 폼이 체화되지 않으면 한계는 뚜렷하고 더 나은 즐거운 경기를 할 수 없다. 자기 옷 같은 좋은 폼을 몸에 입히기 위해서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저런 지루한 연습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개인적으론 좋아하지 않지만 호날두는 팀훈련이 끝나고도 운동장에 남아 프리킥 같은 킥 연습을 따로 했다고 한다. 메이저리거 이정후도 휘문고 때 하루에 200개의 스윙을 매일매일 했다고 한다. 노력은 기본인 것이다. 운동뿐만 아니라 예술도 공부도 그렇다. 천재처럼 보이지만 노력에 천재였는지 모른다. 근처를 지날 때 그는 잠시 쉬고 있었다. 얼마 후 뒤에서 슛하는 소리가 들렸다. 경기에서 연습한 것이 성공하면 그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도 그 쾌감을 느끼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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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흥2리 포구에서 ‘태신’에서 ‘남태’로 이름을 갈아입은 해안도로를 따라간 올레길은 가로수로 인해 바다 풍경이 닫혔다 열렸다 다시 닫혔다. 닫힌 것이 싫었는지 길은 도로에서 샛길로 빠져 바다로 더 가까이 갔다. 황근 복원지 안내판이 보였다. 분산해서 복원지를 만든 모양이다. 한 곳이 실패해도 다른 곳은 성공할 수 있으니 좋은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낮은 시멘트 담 위에서 황색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저것이 뭐지? 잠시 의문이 들다 사라졌다. 길은 검은 현무암 영역과 초록의 풀의 영역을 가르며 경계를 짓고 있었다. 해안도로에서 바다로 나가는 시멘트 길이 현무암 해변에 진입하는 곳에 또 주황색 깃발이 세워져 있었다. 정말 뭐지? 두 번째 보니 그냥 세운 것은 아닐 것이다. 주황색 깃발은 주로 위험 경고용 표시라고 한다. 특히 해안가나 바닷가에 있으면 밀물이나 썰물이 진행되면서 조심해야 할 지점을 가리킨다. 당시(5월 19일) 태흥리방파제 물때를 확인해 봤다. 13시 33분이 썰물이 최고점인 만조였다. 그래서 주황색 깃발을 세워둔 것 같았다. 그곳을 지날 때가 14시 10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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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9_141034.jpg <주황색 깃발>


길은 검정과 초록의 경계를 버리고 초록으로 들어가 작은 언덕을 넘어갔고, 2023년에 복원된 봉아니 불턱이 그 길옆에 앉아있었다. 이 불턱은 주변에 물이 없어 여름엔 돌확(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에 고인 빗물로 몸을 헹구었고 겨울에는 솥에 물을 데워 사용했다고 한다. 물질도 고된 일인데 마무리까지 고단했다. 지금은 ‘세계 최초의 전문직 여성’이라며 부르지만 당시 제주 해녀들의 삶을 생각하면 생존을 위한 투쟁이 모든 것이었다. 길은 다시 살짝 언덕을 오르다 해안도로 옆의 작은 숲에 가르마를 낸 길을 따라갔다. 길 중간에 바다로 내려가는 작은 길이 있었다. 그 끝에 하얀 등대가 보였다. 가볼까 하다 시간을 생각하고 지나쳤다. 길은 완만히 내려가다 양식장 모퉁이에서 오른쪽으로 꺾었다. 바다에 닿은 의귀천이 뭍을 갈랐다. 의귀천을 따라 오르다 태흥교 다리를 밑 근처에서 의귀천을 건넜고 바다로 향해 다시 내려갔다. 계속 빨간 부표가 신경 쓰였다. 홀로 있는 것에 마음이 갔다. 길은 태흥 1리 쉼터에서 남태해안도로와 다시 만나 따라갔다. 쉼터를 지나자 바로 ‘벌포연대’가 보였다. 그러나 벌포연대보다 화장실이 더 중요했다. 옆에 있는 화장실에서 생리현상을 해결하고 나와 벌포연대로 갔다. 다른 곳보다 규모는 조금 작다는 인상을 받았다. 연대보다 벌포에 관심이 갔다. 지역 이름인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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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아니 불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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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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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포연대>


태흥리(泰興里)는 한자의 뜻 그대로 크게 흥하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새로 붙인 것이다. 태흥리는 전에 펄개[펄깨] 또는 ( 아래아가 들어가 깨지네요)라 하여 벌포(伐浦)로 표기하였다. ‘펄’은 ‘뻘’의 제주도 방언이며, 포(浦)는 ‘개’의 훈독음 한자로, 곧 ‘뻘로 이루어진 개’라는 데서 이름 붙여졌다. 19세기 중반부터는 봉한이·봉안이·봉한잇개 일대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데서 보한리(保閑里)라 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서보한리와 동보한리를 병합하여 태흥리라 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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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흥환해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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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포는 태흥리 이전의 지역명이었다. ‘봉아니 불턱’의 ‘봉아니’도 ‘봉한이·봉안이·봉한잇개’에서 유래한 것 같았다. 걸었다. 바다 쪽으로 검은 현무암으로 쌓은 대략 1M 높이가드레일을 따라갔다. 주로 바다를 보며. 가드레일이 아닌 못나고 거친 담이 나타났다. 태흥환해장성이었다. 같은 현무암으로 쌓은 것이지만 가드레일은 안에서 밖으로 못 나가게 하는 것이고 환해장성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성격이 다르지만 시간은 그것을 무화시켰다. 가드레일이나 환해장성이나 지나치면 구분이 안 된다. 멀리 홀로 서 있는 등표가 보였다. 마음이 쓰였다. 4코스 종점 남원 포구에 도착했다. 15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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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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