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코스(쇠소깍→제주올레여행자센터, 10.1Km) 3
게우지코지부터 완만한 내리막이었다. 이 길에서 하효항 근처, 나무 정자에서 텐트로 숙박했던 젊은 커플이 생각났다. 이어 그들과 비슷한 나이에 했던, 유사하면서도 무모한 나의 여행이 떠올랐다. 94년 5월에 제대하고 복학하기까지 7개월의 공백이 있었다. 동대문 의류 상가에서 도시락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고 가리봉동 의류물류센터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옮기는 과정에서 보름 정도의 공백이 생겼다. 단돈 5만 원과 얇은 지도책 한 권을 들고 강릉으로 갔다. 무전여행의 느낌으로 노숙하며 강릉에서 부산으로 걸을 계획이었다. 삼척쯤이었던 같다. 걷다 보니 어두워졌고 바다 쪽은 칠흑이어서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었다. 해안도로의 가로등만이 띄엄띄엄 길을 비추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정류장이 보여 거기에서 잠을 잘까 생각해 보았지만 여기도 왠지 위험할 것 같았다. 그때 눈길이 논으로 갔다. 가을이었고 추수가 끝난 논에는 볏짚들이 군데군데 정육면체로 쌓여있었다. 그중 한 곳으로 갔다. 볏짚을 헤집고 그 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너무 피곤해서인지 금세 잠들었다. 그러나 어느새 몸은 추위를 느끼기 시작했다. 몸을 새우처럼 웅크려 열기를 모아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다. 몸의 테두리를 계속 공략하며 열기를 빼앗았던 건 바람이었다. 밤이었으니 육풍이었을 것이다. 바람은 볏짚의 수많은 틈으로 쉬이 들어와 내 몸을 가차 없이 공격했다. 얼마의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지만 몸을 조금씩 움직이며 버텼다. 그러나 버티지 못하고 볏짚에서 나와 아무도 없는, 칸막이가 있는 버스정류장으로 가 의자에 앉으며 몸을 웅크렸다. 몸은 무거웠고 정신은 간신히 버티고 있었으나 어느새 졸고 있었다. 졸며 깨기를 반복했다 우연히 바닷가를 바라봤다. 어둠이 조금씩 엷어지고 있어 사물을 흐릿하게 분간할 수 있었다. 걷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물이 서서히 빠지고 있는 어둠의 해안도로를, 바람에 옷을 단단히 부여잡고 걸었다. 얼마를 걸었는지 모른다. 날이 밝아지고 있는 것을 느꼈으나 일출을 볼 기력은 없었다. 밝아져 춥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냥 좋았다. 고급스러운 차 한 대가 지나다 바로 섰다. 내가 그 차에 다가가자 운전석 유리창이 내려졌다. 조수석에 여자를 태운, 나보다 다섯 살 정도 많은 남자가 나에게 물었다. 어디까지 가냐고. 부산까지 간다고 대답했다. 그는 놀라며 걸어서요? 예. 자신들은 울진에 동굴 보러 가는데 괜찮으면 타겠냐고 했다. 잠시 생각하고 탔다. 얼떨결에 히치하이킹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나하고 다른 부류였다. 부에서 흘러나온 여유가 그들의 태도에서 느껴졌다. 구김이 없었다. 나와 그들의 극과 극의 여행 방법이 차 안에 공존했다. 다행히 그들은 나의 무전여행을 무시하지 않았고 다시 한번 놀라며 안전을 빌어줬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울진의 시외버스터미널에 날 내려놓고 그들은 동굴로 갔다. 간밤의 경험으로 계획을 수정하여 부산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내리막이 끝나자마자 바다로 무한히 열린 공간의 서늘함이 회상 속 나를 깨웠다. 바다를 바로 옆에 둔 해안도로의 시작이었다. 흐린 하늘빛 때문인지 바다도 빛을 잃어 흐린 하늘을 닮아갔다. 몇 척의 배들이 오른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밤새 고기를 잡고 포구로 귀항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바다낚시를 위해 낚시꾼을 태우고 포인트로 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다만 안개로 고기잡이는 힘들었을 것이니 바다낚시를 위한 배라고 추측했다. 낚시 배를 암시하듯 검은 암석 해안 끝에 한 남자가 낚시를 하고 있었다.
양식장이 끝난 근처에 큰 아이스크림콘 모형이 해안가에 세워져 있다. 시선은 아이스크림콘 모형에서 맞은편 건물로 저절로 옮겨갔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유도였다. 그 건물은 카페였다. 종교(기독교)적 색채가 있는 북카페인 ‘카페 가까이’였다. ‘가까이’에서 왜 한자 ‘人’을 떠올렸을까? 혼자 걷고 있는, 그래서 몰래 스며든 외로움 때문일까? 가끔 생각한다. 외로움, 고독 이런 것들이 삶의 본질은 아닐까?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말의 압축어인 ‘사회적 동물’과 ‘人’은 저런 쓸쓸한 본질을 숨기기 위한, 당위적으로 가장한 표현은 아닐까? 하고. ‘가까이’에서 ‘홀로’를 보고, 걷고 있는 걷고 지금의 나를 인식했다. 여기는 아이스크림이 유명한가 생각했는데 귤당 크로플이 유명했다. 걷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사람처럼 고민 없이 지나쳤다.
보목포구까지 지명을 알리는 여러 석판이 있었다. 북동풍과 서북풍이 강하게 불어도 다른 곳에 비해 잔잔한 곳인 명지미/맹지미, 바닷물이 들어왔다 증발하면서 하얀 소금이 남았다는 소금코지(소금밭), 썰물이 심해 포구에 배를 댈 수 없을 때 파도가 잔잔해 배를 댔다는 배내듯개, 해녀들이 물질과 수영을 배운 큰업통, 하효동과 보목동의 경계가 되는 둔덕인 골매, 하효동과 경계 바닷가인 명지미개, 보목리와 하효 경계에서 솟던 세경물, 제지기오름 남쪽 바다로 제지기오름 바위가 생겨난 데서 연유한 설엉앞 등이었다. 하효동 석판(명지미, 소금코지, 배내듯개, 큰업통, 골매)은 검은색이었고, 보목동 석판(명지미개, 세경물, 설엉앞)은 자연 그대로의 석판이었다. 보목포구 배경이 되는 제지기오름은 오름 남쪽 중턱에 굴이 있는데 이곳에 절과 절지기가 있어 절오름이라고 했다, 이것이 와전되어 제재기오름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지금은 제지기오름으로 불린다. 이 오름은 해발 94.8m로 낮지만 정상에 오르면 아름다운 바다풍경과 함께 일출과 일몰을 다 볼 수 있다고 한다.
보목포구까지 가는 길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섶섬이었다. 배내듯개와 소금코지 석판이 있던 곳에서 섶섬은 신비로움을 자아냈다. 안개가 섬을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개 때문에 섬은 신성하게 보였다. 그래서 보는 순간 짧은 탄성을 자아냈다. 걷는 내내 섶섬에서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모습을 봤다. 안개는 물러갔지만, 흐린 날씨 때문인지 안개의 흔적처럼 투명한 막이 섬을 감싸며 보호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섶섬과 함께 서귀포 앞바다에 있는 새섬, 문섬, 범섬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아름다운 섬으로 서귀포 해양도립공원에 속해있다. 이 중 문섬, 범섬, 섶섬은 유네스코 생물 보전권 지역으로도 등록되어 있다. 섶섬에서도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보목포구를 지난 길은 마을로 들어갈 듯하다 보목천에서 바다가 다시 그리웠는지 다리를 건너 바닷가로 갔다. 그 길은 숲이 아니어도 나무로 가득한 길이었다. 다리를 건널 때 나무에 반쯤 걸친 섶섬이 보였다. 뒤돌아보니 야트막한 제지기오름도 보였다. 다리와 길이 만나는 모퉁이 아래에 ‘진동산 쉼터’가 있다. 많이 허름했다. 6코스에서 잠시 쉬었다 가는 주막 같았다. 진동산? 어딜까? 바로 앞에 숲이 있었다. 이곳이 진동산인가? 산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작았다. 이곳에서 나도 모르게 짧은 미소를 지었다. ‘스치면 인연, 스미면 사랑’이라는, 주막에 걸릴만한 문구 때문이었다. 보목포구가 보였다. 여전히 흐렸다. 하루 종일 저런 낯빛의 풍경일 것 같아 시간이 멈춘 듯했다. 빛은 풍경에 시간의 흐름에 따른 다양한 표정을 준다. 그래서 시간을 느낄 수 있다. 오늘은 어떨지 모르겠다. ‘진동산 쉼터’에 인연만 남기고 스쳤다.
양편으로 나무가 우거진 길에서 나무 그늘이 생겼다. 하늘이 잠시 얼굴을 내밀었나 보다. 밝은 표정의 풍경이 잠시 보였다. 그러나 그 짧은 길을 지나자 다시 길은 차가워졌다. 차가움도 표정이라면 표정이다. 뭍으로 조금 들어온, 보목동 남쪽 해안의 큰 포구 머리가 육지에 연결되었다는 의미를 지닌 큰개머리 안내석이 보였다. 큰개머리를 지나면 길은 콘크리트 길을 버리고 좁은 숲길로 들어섰다. 짧은 어두운 숲길은 드디어 바닷가의 해안도로와 다시 조우했다. 이곳에서 바라본 섶섬은 켰다. 근처에 동애기 석판이 있다. 동애기는 섬도코지의 동쪽에 있고, 섶섬과 섬도코지 사이가 마치 동쪽은 넓고 서쪽은 좁은 형상이어서 어귀를 닮아 동어귀로, 다른 글에서는 아귀의 입을 닮아 동아귀로 불리다 동애기로 와전되었다고 한다.
섬도코지는 뭐지? 궁금하던 차에 검은 암석 해변이 다른 곳보다 넓게 펼쳐진 곳이 보였다. 이곳이 섬도코지였다. 섬도코지는 섬도(‘도’는‘입구’로 섬의 입구라는 뜻)의 곶으로 섶섬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곳이다. 최단 거리가 100m 정도라고 한다. 육안으론 알 수 없어 맵으로 확인했다. 섶섬을 향해 검은 해안이 앞으로 나가 있었다. 물살이 약하면 수영으로도 충분히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나는 수영을 못한다.
안개가 다시 몰려왔다. 섬도코지를 지나니 안개 낀 섶섬과 함께 오른쪽으로 섬 두 개가 작게 보였다. 좀 더 크게 보이는 것이 문섬이고 더 뒤에 있는 것이 범섬 같았다. 섬들이 자주 보였다. 자연스럽게 작년 10월에 걸었던 제주도 북쪽 올레가 생각났다. 걸으면서 섬은 딱 한 번 봤다. 한림항에 근처의 비양도였다. 엄밀히 말하면 비양도는 제주도 서쪽에 있다. 제주도 동쪽에는 우도가 있다. 비양도와 우도 사이, 제주 북쪽 해안에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섬은 하나도 없었다. 추자도는 북쪽에 있으나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제외해야 한다. 남쪽은 섬이 이정표처럼 군데군데 분포해 있다. 이렇게 북쪽엔 섬이 없고 남쪽에 섬들이 분포한 지질학적 이유가 있을까? 돌아와 찾아보았지만 발견할 수 없었다. 우연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거북이의 머리와 꼬리를 닮았다고 하는, 작은 포구인 구두미포구를 지났다. 올레길은 구두미포구에서 내륙으로 들어가는 해안도로를 버리고 다시 바다와 가까운 뭍의 끝자락인 나무숲 길로 주저 없이 들어갔다.
(2025.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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