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코스(쇠소깍→제주올레여행자센터, 10.1Km) 4
구두미포를 알리는 안내판을 지나 숲길로 들어섰다. 숲길이 계속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섶섬과 문섬, 범섬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휴식공간이 바로 나왔다. 눈에만 잠시 담고 지나쳤다. 해안가를 따르는 좁은 숲길이었다. 여기서부터는 드문드문, 나무에 가려졌다 열린 공간에서 섶섬, 문섬과 범섬을 보며 걸었다. 섬들은 항해하는 선원들에게 방향의 기준점이 된 북극성 같았다. 다만 나에겐 방향의 기준점이 아니라 존재의 확인이었다. 특히 섶섬은 더 그랬다.
이런 숲길에서는 생각을 깊게 할 수 없다. 불쑥 솟은 돌부리에, 드러난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길로 뻗은 나뭇가지에 얼굴이 긁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전방 주시와 걷는 것에만 집중해야 했다. 이것저것 분절된 생각들이 끝없이 떠오르는 나에겐 생각을 차단할 수 있어서 좋았다.
제주대학교 연수원을 지나 ‘소천지 정자’라는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바닷가로 내려가는 짧은 나무 테크 길이 정자를 잇고 있었다. 정자 정면에 투명한 녹색 물을 담은 웅덩이가 보였다. 물을 담은 바위의 모습이 백두산 천지와 비슷하여 이곳을 소천지로 부른다고 한다. 맑은 날엔 소천지에 한라산이 드리운다고 하는데 오늘은 흐려서인지 하늘과 한라산을 담지 못하고 바닥만 보여주고 있다. 소천지보다 멀리 문섬 근처 서귀포항 위에 드리운, 구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짙고 낮게 깔린 하얀 덩어리에 눈길이 갔다. 안개 같았다. 저런 안개가 걸어오는 동안 어느새 섶섬의 머리에도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초록의 띠로 남은 섬이 더 이상 밀리지 않으려 안개의 하강을 절연히 막아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처음에 느꼈던 신비로운 초록과 하얀색의 대비는 이젠 처절한 전쟁의 전선처럼 보였다. 초록은 너무 선명해서 현실적 존재로 보였고 하얀 안개는 모호해서 신화적 존재로 느껴졌다. 존재와 비존재의 투쟁 같았다. 숲길 내내 섶섬에서 벌어지는 저 투쟁을 보며 걸었다. 섶섬이 안개에 지워지고도 하고, 안개를 작은 구름처럼 만들어 섬 주변으로 몰아내기도 했다. 때론 완전한 초록 섬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존재의 모습을 확인하며 걸었다. 문섬의 경우 안개 덩어리가 섬보다 멀리 있는지 섬의 온전한 모습을 계속 드러냈다.
소천지를 지난 올레길은 구두미 포구에서 헤어졌던 도로에 닿을듯하다 획 돌아서 바다로 향한 숲길로 다시 내려갔다. 숲길은 보목하수처리장에서 사라져 돌하르방이 서 있는, 국궁을 할 수 있는 백록정과 게 모양의 느리게 가는 편지를 담은 겡이 우체통 그리고 밭담이나 축대처럼 보이는, 성벽인지도 알 수 없는 토평환해장성과 검은 돌투성이인 검은여 해안을 지나서 세련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백록정과 검은여 해안 사이의 길은 콘크리트였고 바다 쪽 경계석은 무지개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이곳에서 바다로 향한, 거칠 것 없는 개방감에서 시원함을 느꼈다. 안개가 걷힌 섶섬과 문섬이 보였다. 해안가의 바위들은 용암이 급하게 식었는지 뾰족해서 위험해 보였다. 그 모습에서 바위에 부딪혀 그대로 멈춘 파도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했다. 겡이 우체통에서 ‘겡이’는 제주말로 ‘게’로 보통 바닷가에 보이는 작은 게를 말한다. 걷다 보면 작은 게를 정말 많이 볼 수 있다. 토평환해장성은 많이 아쉬웠다. 안내판이 전봇대 옆에 작게 세워져 있고, 그것도 토평환해장성이 아닌 문화재 보호 안내문이었다. 자세히 보지 않고, 읽지 않으면 토평환해장성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환해장성 위쪽에 흙이 있어 밭담이나 밭의 축대로 생각하고 그냥 지나칠 수 있다.
‘검은여’에서 ‘여’는 밀물 때 잠기고 썰물 때 드러나는 바위나 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를 말하는 제주말이다. 그 ‘여’가 검은색이어서 ‘검은여’로 불린 것이다. 검은여 해안 길은 서귀포 KAL 호텔의 해안 경계의 길이었다. 하얀 통신 탑을 끼고돌자 검은여가 드러났다. 드러난 것을 보니 썰물 때인 것 같았다. 검은여는 바위들의 벌판이었다. 처음엔 용암이 식으며 굳어진 넓은 판 모양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바람과 파도의 압력에 판이 수많은 바위로 갈라진 것 같았다. 검은여 너머에 문섬과 서귀포항, 서귀포항 뒤의 새섬이 보였다.
검은여가 끝나고 초록의 식물들이 가이드하는 길로 들어섰다. 물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평의 파도 소리 말고 수직으로 흐르는 물소리는 처음이었다. 잠시 멈춰 맑고 경쾌한 소리를 들었다. 바닷가의 흙길이 나왔고 멀리 섶섬은 여전히 안개와 힘겨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경사가 있는 나무계단과 대나무 숲 그리고 폭이 50cm 정도의 아주 좁은 숲길을 지나자 돌로 잘 만든 전망대가 나왔다. 지나온 검은여가 한눈에 보였고 같은 방향이라 어쩔 수 없이 섶섬의 전장을 또 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부터 소정방 폭포까지 파라다이스제주 호텔의 해안 경내를 지나는 길이었다. 호텔 내의 허니문하우스라는 카페로 오르는 계단 시작 부분에 서 있는 사각 돌기둥 위에 여자 아이가 잃어버린 금색과 베이지색의 신발 한 짝이 외로이 놓여있었다. 순간 하얀 스타킹과 하얀 드레스를 입었을 주인의 옷차림이 저절로 떠올랐고, 아빠에게 안겼다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떨어뜨렸고 시간이 지나 누군가 그 신발을 집어 잘 보이는 돌기둥 위에 놓았을 상황도 그려졌다. 다시 한번 신발을 보고 계단을 올랐다. 이후 길은 잘 다듬어진 박석들이 깔린 숲길이었다. 문섬과 섶섬이 보였다. 어느새 안개는 섶섬부터 문섬과 범섬까지 커다란 띠를 이루며 섬들을 지우려 하고 있었다. 전쟁의 전선이 넓어졌다. 파라다이스 제주 호텔의 길은 소정방 폭포에서 끝났다.
소정방 폭포에는 중국인 여럿이 폭포를 또는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폭포의 크기는 생각보다 작았다. 정방폭포보다 작아서 소정방 폭포라고 부른 것 같다. 나는 폭포보다 절벽을 이루고 있는 쪼개진 작은 바위들에 눈길이 갔다. 마치 선박에 붙은 따개비처럼 보였다. 저 따개비를 떼어내고 싶었다. 벌써 누가 떼어 놓았나 보다. 절벽의 바닥에는 절벽에서 떨어졌을 것으로 생각되는 돌들이 쌓여있었다.
바다와 닿아있는 양옆 절벽의 하단에는 건조를 위해 세워둔 나무들 같은 수직의 주상절리가 있었다. 용암이 급격한 온도 변화에 빠르게 식어 굳어진 표면을 내부의 용암이 뚫지 못하고 그대로 식으며 상하좌우 모든 방향으로부터 수축한다. 그러나 상·하 방향은 중력 때문에 수축을 막아 길이가 유지되지는 반면 좌·우 방향은 수축을 막을 힘이 없어 수축하며 갈라지게 된다. 이것이 주상절리 형성의 원리이다. 시간, 온도 변화, 힘의 유무로 저런 형상이 만들어진다는 것이 너무도 경이로웠다. 과학적 원리를 알 수 없었던 시절에는 신화나 전설로 이 현상을 설명하려 했다. 하늘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서로 사랑한 선녀와 용이 주상절 리가 되었다는 전설, 자신을 희생하여 용암으로부터 마을 구한 남자가 용암에 의해 주상절 리가 되었다는 전설, 하늘과 땅을 틈을 메우기 위해 거인들이 만들었다는 돌기둥 전설 등이 있다. 결국 신화나 전설은 인간의 궁금증을 풀려고 했던 과학 이전의 이해 도구였다. 오른쪽 주상절리를 보면 안으로 들어간 공간이 있다. 파도가 절벽을 깎아 만든 동굴(해식동)인 소정방굴이다. 지금은 그곳으로 가는 길이 막혀있어 소정방 폭포에서 육안으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소정방 폭포 옆에 있는 소라의 성에서 중간 스탬프를 찍었다. 소라의 성은 소라를 형상화한 것으로 단순하면서도 곡선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건축물이라고 한다. 전체적 모습을 볼 수 없어 그것을 느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주한프랑스대사관, 올림픽공원 상징조형물을 지은 우리나라 1세대 유명 건축가인 김중업 님이 1969년에 건축했다는 것에 놀랐다. 56년 전에 지어진 것인데도 옛날 냄새가 전혀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김중업 건축가의 감각을 알 수 있었다. 현재는 북카페로 운영되고 있는데 외부에서 원기둥 같은 외형만 보고 다시 걸었다.
목판이 깔린 길이었다. 말들이 풀을 뜯고 있는 풍경, 1990년에 발생한 남한조선노동당 간첩 사건의 현장의 안내판, 남영호조난자 위령탑을 지났다. 다시 돌아와 위령탑에 섰다. 1970년 12월 14일 서귀포항을 출항하여 부산으로 가던 남영호는 다음 날인 15일 여수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338명의 승객 가운데 323명이 희생됐고 이 중 305명은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고 한다. 사고 원인은 화물 미결박, 초과 여객 승선 그리고 과적이었다. 즉 인재였다. 44년 후인 2014년에도 비슷한 원인으로 세월호 참사가 반복해서 일어났다. 희생자로 보면 세월호보다 더 많아 대한민국 최대의 해양참사였다. 이런 역사의 반복은 없어야 한다. 잠시 묵념하고 무거운 마음을 안고 떠났다.
(2025.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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