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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한라산

7-1코스(서귀포 버스터미널←제주올레여행자센터, 15.7 km) 3

by 커피소년

나무로 가려졌던 공간이 열리자, 풀과 키 작은 나무 사이로 길은 오르고 있었다. 마치 길은 작은 언덕을 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뒤돌아서자 지금 오르고 있는 곳이 언덕이 아니라 산이라는 것을, 잠시 멈춰 선 곳이 산의 정상 부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맞은편에 거대한 부드러운 초록 융단이 시야 가득 펼쳐져 있었다. 초록은 밝기도 했고 짙기도 했다. 한라산이었다. 걸음을 빨리했다. 정상에 오르니 산불 감시 초소가 보였다. 좀 더 높은 곳에서 한라산을 보고 싶어 올랐다.

<고근산 정상부근에서 본 한라산>

한라산 정상은 비구름으로 인해 보이지 않았다. 비구름은 오른쪽이 더 짙어 어두웠다. 농담으로 무정형의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비구름 밑으로 초록의 대양이었다. 산이라는 느낌보다는 끝없이 출렁이는 초록의 바다였다. 초록의 융단은 너무도 작은 비유였다. 한라산은 크기를 가늠할 수 없었다. 내 감각이 받아들일 수 있는 크기와 넓이를 넘어섰다. 한계를 넘어선 감각은 고장을 일으켰고, 그것은 전율로 나타났다. 크기로는 무엇에도 밀리지 않는, 성큼성큼 걸었을 송전탑들이 작은 장난감 송전탑처럼 보였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벌어진 곳을 집은 스테이플러 철심 같기도 했다. 카메라 기능 중 풍경의 사물을 작은 장난감처럼 보여주는 미니어처 기능을 사용한 풍경 같았다. 비가 쏟아져 시야를 방해하고 있어도, 한라산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위용을 또렷이 보여주었다. 넋을 잃고 봤다. 대양은 용암으로 변했다. 밝은 초록이 짙은 초록 사이로 흘러가고 있다고 느꼈다. 그건 물줄기가 아니라 용암이었다. 초록의 용암. 한라산이 바닷가까지 내보낸 붉은 용암은 식으며 제주도의 지반이 되었고, 그 위로 초록의 용암이 한라산에서 매년 저렇게 흐르고 있었다.

<고근산 정상에서 본 한라산>


잠시 후 여성 한 분이 하얀 우비를 입고 정방향으로 올라와 바로 아래에 있는 간세에서 중간 스탬프를 찍고 초소를 향해 오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초소에 다다를 때 내려갔다. 이곳은 오롯이 홀로 풍경을 보는 장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느낀 것을 그녀도 느꼈으면 했다. 그래서 인사도 없이 지나쳤다.

<고근산 정상에 있는 산불감시초소>


중간 스탬프를 찍고 다시 걸었다. 여전히 우산을 썼다. 비가 생각보다 많이 와서 그녀처럼 우비를 입을 생각하다 우비가 주는 땀복 같은 느낌 때문에 포기하고 우산으로 버티기로 했다. 길은 산 정상을 거의 한 바퀴 돌았다. 나무들로 닫힌 공간과 나무가 없는 열린 공간이 번갈아 나타났다. 또한 군데군데 전망대와 전망안내판이 있었다. 비가 오니 번거로워 망원경으로 풍경 보는 것을 포기하고 지나쳤다.


나중에 알아보니 고근산에는 전설 하나가 있었다. 제주도를 만든 설문대할망이 머리를 백록담에, 엉덩이를 고근산 굼부리(분화구의 제주어)에 대고 다리는 밤섬에 걸치고 물장구치며 놀았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정상을 거의 한 바퀴 돈 이유가 설문대할망이 엉덩이를 대었던 분화구를 보여주려고 한 것 같았다. 그러나 비가 왔고 분화구라고 하기에는 나무들이 너무 자라있어서 분화구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또한 ‘고근孤根’이란 이름은 근처에 다른 산이 없이 외로이 있다고 해서 지어졌다. 고근산 주변 마을은 예로부터 고근산을 영산으로 여겼으며 이로 인해 중턱 이상에는 무덤을 쓰지 않는 금장 지역 풍속이 생겼고,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다고 한다. 제주도에서 오름에 산이라고 불리는 곳에는 대체로 금장 구역이 있어 중턱 이상에는 무덤을 쓰지 않았다. 군산 그렇고, 산방산이나 영주산, 송악산도 그렇다고 한다.

<고근산 분화구, 그러나 나무들로 인해 볼 수 없었다>


내려가는 길은 초반에 나무계단이었으나 이후부턴 흙길이었다. 우산을 쓰고 스틱을 짚고 내려가는 것이 너무 불편했다. 그래서 우산을 접고 비를 맞으며 걷기로 했다. 엉또폭포로 내려가는 산길은 세 개의 도로와 만나 잘린다. 첫 번째 도로와 만나기 전, 가파른 숲길에서 검은 우의를 입고 올라가는 남자와 스쳤다. 그러면서 ‘수고하세요’라고 서로 말하며 서로 응원했다. 이런 날에 올레 산길을 걷는 미친 서로를 위한 응원이었다.

<고근산 내려가는 길>


도로를 조금 걸으니 다시 숲길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보였다. 그 화살표 전에, 도로에 KUMF라고 쓰인 작은 사각형 안내표지가 보였다. 그 안의 화살표도 올레길을 가리켰다. 올레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하며 숲으로 들어갔다. 길은 비로 인해 엉망이었다. 고근산에서 내려오면서 신발은 다 젖었다. 신발마저 젖어버리니 안 젖으려는 노력은 쉽게 포기가 되었다. 오히려 편했다. 그래도 물웅덩이는 피하며 걸었다.

<숲길>


길은 두 번째 도로와 만났다. 그곳에도 KUMF가 도로에 있었다. 사각형 안에 있는 화살표도 올레를 가리켰다. 너무 궁금해서 나중에 검색해보았다. KUMF는 Korea Ultra-Marathon Federation의 약자로 사단법인 대한울트라마라톤연맹을 의미했다. 울트라마라톤은 여러 지역에서 열리는데, 제주에서도 열린다. 종목은 로드와 트레일 런이 있고, 로드는 50, 100, 200 km으로 구분되고 제주를 한 바퀴 돌았다. 트레일 런은 60, 80 km으로 구분되고 제주시 탑동에서 출발하여 한라산을 넘어 서귀포시 월드컵 경기장에 도착하는 코스였다. 한라산을 넘으면 고근산을 지나는데 이때 경로를 표시한 것이 KUMF 표지였다. 올레길과 겹쳤던 것이다. 종종 10km를 뛰고 있는 나지만, KUMF가 나타내는 거리의 숫자와 코스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특히 한라산을 넘는 트레일 런은 더욱 그러하다. 10km 뛸 때도 8km가 넘어가면 얕은 경사에 한 걸음을 떼는 것이 힘들다. 마치 45도 이상의 경사를 오르는 느낌이다. 그런데 한라산이다. 한라산을 지나면 또 고근산이다. 이건 미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체력도 체력이지만 정신력이 강하지 않으면 절대 완주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를 뛰는 선수에게 경의를 표한다.

< 울트라마라톤 표지>

도로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지나니 바로 도로를 사이에 두고 젖고 있는 숲길이 이어졌다. 화살표가 보였다. 멧돼지 출현을 알리는 경고판을 뒤로 하고 도로에서 벗어나 또 숲길로 갔다. 하늘이 열린 초록의 길이었다. 열려도 하늘은 어두웠고 비로 인해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이내 길은 하늘을 가리고 있는 앙상한 나무들 사이로 희미하고 거칠게 나 있었다. 나무 숲길에서 어느 순간부터 낮은 긴 돌담들이 보였다. 그 돌담의 용도를 모르겠다. 확실한 건 지금은 쓸모가 없는 것처럼 버려진 느낌이었다. 경계를 나타낸 돌담일까? 숲길은 세 번째 만난 시멘트 도로에서 끝났다. 여전히 비는 오고 있었다. 지나온 길이 숨어있는 숲을 보았다. 비를 맞아 초록은 더 짙어 무거워 보였다. 그리고 어떤 생명이 느껴졌다. 그 생명은 잔뜩 웅크리고 있었고 그로 인해 어두워 보였다. 거기에 외피의 무거움까지 더해져 그것은 웃음기 없이 진지했다. 나는 저 한없이 진지한 숲이 낸 길을 지나왔다. 돌담이 있고, 풀이 자라고, 나무가 솟아 하늘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공간은 곳곳이 비어있었다. 그래서 숲의 속은 공허했다. 공허하기에 저렇게 진지한 걸까? 비에 젖고 있는 숲을 보니 이현승 시인의 ‘비의 무게’라는 시가 떠 올랐다.


비의 무게


이현승


분리수거된 쓰레기들 위로

비가 내린다

끼리끼리 또 함께

비를 맞고 있다


같은 시간

옥수동엔 비가 오고

압구정동엔 바람만 불듯이

똑같이 비를 맞아도

폐지들만 무거워진다


같은 일을 당해도

어쩐지 더 착잡한 축이 있다는 듯이

처마 끝의 물줄기를

주시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내리는 빗속에서

더 이상 젖지 않는 것들은

이미 젖은 것들이고

젖은 것들만이

비의 무게를 알 것이다


<숲길>

<지나온 숲>

숲에서 느낀 생명은 나였다. 숲은 나에 대한 은유였다. 속이 공허해서, 이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쓸데없이 진지한 척하고 있다. 텅 빈 속이 드러나는 것이 너무 창피하다. 껍데기뿐인 나를 꺼내놓은 것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용기가 없다. 할 수 없이 척한다. 그러므로 나는 가식 가득한 인간이다. 그러기에 숲에서 진지함을 두른 공허를 본 것이다. 숲도 젖고 있고 나도 젖고 있다. 비는 때론 홍수로 숲을 쓸어버리듯, 비의 무게는 텅 빈 나를 무너뜨릴 것이다. 붕괴하고 나서야 어쩔 수 없이 볼품없는 나는 드러날 것이다. (2025.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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