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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름 Jan 13. 2024

냉전의 한복판에서 진실을 갈구한 그녀들

하루한권독후감 20240111 <냉전의 마녀들>


[20240111] 김태우, <냉전의 마녀들>, 창비, 2021.


우리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해'라고 하면 당연히 기습남침을 당한 남한의 피해를 떠올린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남한뿐 아니라 북한 지역까지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비록 선공을 했기에 반격 차원에서 행해진 폭력이지만, 전쟁이 왜 일어나고 어떻게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애꿎은 북한 인민들도 죽어나갔다. 그런 상황에서 북한 여성들의 소식을 접하고 평화와 진실을 위해 전쟁 중인 북한에 직접 방문한 여성들이 있다. 김태우의 <냉전의 마녀들>은 그들에 관한 이야기다.


1950년 11월 이후 미 공군은 북한 지역 내의 모든 농촌과 도시를 핵심적 '군사목표' 그 자체로 간주한다. 군사시설에만 제한적인 '정밀폭격'을 행했던 이전과 달리 '초토화 정책'을 실시, 인구 밀집 지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차별적인 소이탄 폭격을 가했다.


신의주의 경우 1950년 11월 8일 단 하루 동안 640톤의 폭탄, 8만 5000발의 소이탄이 투하되어 미 공군은 신의주시 184만 제곱미터 중 약 110만 4000제곱미터 이상이 완전 파괴되었다고 결론 내릴 정도였다. 당시 신의주에는 1만 4000호의 가옥에 12만 6000명이 거주했으니 건물 1채당 평균 6.07발, 사람 1명당 평균 0.67발에 달하는 소이탄이 단 하루 만에 투하된 것이었다.


1951년 1월 4일, 조선민주여성동맹에서 이러한 미군의 '초토화 정책'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는 장문의 편지를 발표한다. 제목은 <전 세계 녀성들에게 보내는 편지>. 이에 반응한 유일한 국제단체가 바로 1945년 프랑스민주여성동맹이 전 세계 각국의 반파시스트 투쟁 경력 여성들을 초청한 뒤 창설한 국제민주여성연맹, 줄여서 국제여맹이었다.


국제여맹은 반파시즘, 반식민주의, 반인종주의를 내세웠던, 이전의 서구 부르주아 여성단체나 공산주의 하의 여성단체와는 사뭇 다른 국제여성단체였다. 국제여맹은 냉전이 본격화되기 이전인 1946, 1947년부터 제3세계 여성들의 삶을 조사하기 위한 진상조사단을 남미와 동남아에 파견하는 행보를 보여주었다. 그렇기에 1951년 국제여맹이 북한 여성들의 호소에 반응해 현지조사단을 파견한 것은 일각의 주장처럼 소련의 지시에 따른 정치적 이유에 비롯한 것이라 보기 힘들다.


북한 여성의 절박한 호소에 대응하기 위해 국제여맹은 조사단을 꾸리기로 한다. 그 결과 1951년 5월, 18개국의 21명 여성들이 북한으로 향했다. 덴마크, 체코슬로바키아, 네덜란드, 영국, 소련,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동서독, 벨기에, 캐나다, 쿠바, 아르헨티나, 튀니지, 알제리, 중국, 베트남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출신의 여성들로 구성됐다. 이들은 모두 자국에서 노골적인 성차별을 경험했지만, 동시에 전도유망한 여성 리더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특히 영국의 조사위원인 모니카 팰턴의 경우, 당시 영국 집권 여당인 노동당의 대표적 여성 리더로 여러 공직들을 거쳐 국가 재건의 중책을 맡는 등 최고의 여성 엘리트였다. 이후 팰턴은 자신의 북한 방문기를 책으로 자세히 남긴다. <냉전의 마녀들>은 그의 행적을 중심으로 다른 자료들을 교차 검증하는 식으로 내용이 구성됐다.


이후 국제여맹 조사위원단이 북한에서 열흘간 겪은 경험을 약술하자면 이렇다. 북한 지역에선 미군에 의한 파괴와 학살, 강간이 벌어졌다. 시가지는 멀쩡한 건물 없이 죄다 황무지로 변했고, 사람들은 좁디 좁은 토막굴에서 간신히 비를 피하는 정도였다. 어딜 가나 자식과 남편을 잃은 여성들이 조사위원들에게 자신들의 신세를 눈물로 호소하고 미군의 악행을 폭로하기 바빴다.


수십 년을 크리스천으로 살았던 한 노인은 '당연히 같은 크리스천인 미군이 교회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교회로 피신했지만, 교회 역시 폭격의 대상에 불과했다'며 '이제 나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다'고 조사위원들에게 얘기했다.


저자는 이런 증언들에서 하나 같이 '미군이 악행을 저질렀다'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며, 당시 북한 일대에서 잔인하기로 악명 높았던 우익청년대의 얘기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북한 정부에서 파견한 통역사들의 왜곡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팰턴을 비롯한 몇몇 위원들 역시 그러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나름대로 진실을 찾고자 했지만, 언어의 장벽은 너무 높았기 때문에 결국 미군의 악행만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북한은 이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경무대에서 탈취한, 이승만의 북침 준비를 위한 군사원조 요청문서 등을 국제여맹 조사위원단에게 보여준다. 하지만 조사단은 그 어떤 문서도 남한의 북침이라는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지 않다고 판단, 최종보고서에서 아예 그 내용을 포함하지 않았다.


그렇게 국제여맹의 <우리는 고발한다>는 전세계에 발간되었다. 여기에는 미군에 의한 학살과 성폭력 등 악행들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식 반응은 철저한 무시와 무대응이었다.


미국 정부는 국제여맹을 "공산당 전선조직"이라 낙인 찍고 자국 내의 보수적 여성단체들로 하여금 국제여맹에 대한 공동 비판 성명을 발표하게 했다. 그 결과 유엔경제사회위원회 자문 역할을 맡고 여성지위위원회 같은 유엔 내부 기구에서 활발히 교류하였던 국제여맹은 1954년 유엔 내 모든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각 조사위원들 역시 국제여맹과 마찬가지로 수난에 처했다.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들의 조사위원들은 수난을 겪지 않았지만 혁명 이전 쿠바에서 온 깐델라리아 로드리게스, 서독의 릴리 베히터, 영국의 팰턴 등은 정치적 탄압과 사회적 박해를 견뎌야 했다.


로드리게스는 북한에서 쿠바로 돌아오는 길에 뉴욕에서 체포되어 군사정보부와 공산주의활동조사국으로 이송, 투옥되었고 베히터는 자신이 북한에서 보고 들은 것을 대중 연설하다가 독일관리이사회 법령 14조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힘든 재판 과정 끝에서야 자신의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심지어 팰턴의 경우 반역죄로 사형까지 거론되었으며 결국 말년을 자신의 고국이 아닌 인도로 망명해 보내야했다. 팰턴은 그곳에서 사망했다. 진영 논리 속에서 진실을 알고자 한 이들의 비참한 말로였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 험한 일들을 겪으면서도 누구도 국제여맹 보고서의 내용을 부인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국제여맹의 보고서가 북한 측의 왜곡이 가미됐을 가능성이 있고, 미군의 악행에 중점을 두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들이 친소적이고 친공산주의적이어서가 아니었다. 정말로 그들이 친소적이고 친공산주의적이었다면 북한이 제공해준 '북침 문서'들을 최종 보고서에 넣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저자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언급한 대로, 다만 그들은 전쟁의 지속과 전쟁의 형식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하였을 뿐이다. 하지만 미소 간의 냉전 시대라는 극도의 진영논리 하에서 그들의 보편적 의문은 누군가를 향한 적대적 공격으로 인식되었다.


불행히도, 내가 보기엔 지금의 한국 사회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한국 사회는 더 이상 흑백논리에 머무르지 말고 그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더 나은 방향과 진실을 위해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념에 개의치 않은 채 엘리트 자리를 박차고 평화와 진실을 위해 떠난 여성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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