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다. 양이 거울 속 자신을 여러번 보는 것은 그의 핵심기억에 꽤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마음의 창에 무엇을 비춰보았는가. 안드로이드에게 마음이 있나. 그것은 프로그래밍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미카에게 접목한 사과나무를 보여주며 너와 이어진 가족 양쪽 모두 네게 중요하다고 알려준 것도 프로그래밍된 대답인가. 가족을 잃고 두번째 집으로 갔다가 우울해보인다고 반품 당한 양의 상태는 프로그래밍된 감정인가. 그렇다면 안드로이드의 핵심 기억의 저장 기준은 무엇인가. 끝도 없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양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것뿐이다. 남의 일기장을 몰래 엿보는 부끄럽고 미안하고 그렇지만 호기심이 가득한 마음으로.
우리는 불완전한 기억을 공유하며 그 어긋남 속에서 우리가 괜찮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거나, 다른 이야기를 꺼내지만 완전한 기억 안에서 재편성될 수 있다. 양이 작동을 멈춘 후에야 그들이 양을 가족으로 인지한 것처럼.
사실은 저 앞에 쏟아낸 모든 질문은 인간 중심적인 질문이다.
모든 존재들이 인간을 동경하고 인간보다 낮은 위치에 있을 거라는 오만과 착각으로 이뤄진 질문.
미카의 가족은 전부 인간으로 구성되었지만 이미 정상 가족의 범주를 벗어난 상태이다. 백인 남성, 흑인 여성, 중국인 여자아이, 그 아이를 위해 사온 중국계 남성 로봇. 이 가족뿐만 아니라 영화 속 사회 자체가 ‘정상 가족’이라는 단어가 무의미한 시대이다. 정확한 시대가 명시되진 않았지만 옆집에 복제 인간이 살고, 그것을 밝히는 것에 거리낌이 없고, 마음만 먹으면 안드로이드를 사올 수 있다. 그러나 이 먼 미래의 세계관에서 제이크는 왜 옆집 복제 인간 쌍둥이를 싫어하는가? 이유가 나오지 않는다. 그는 그저 인간이 아닌 것, 비인간이 싫다. 양을 오랫동안 봤으면서 양이 인간이 되고 싶어하진 않았냐고 에이다에게 묻는다. 그는 자동 운전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핸드폰을 들지 않고 어디서나 편하게 화상통화를 하면서, 여전히 말린 찻잎을 따뜻한 물에 우려 기다렸다 마시는 시간에 머물러 있다.
차 가루를 찾는 사람에게 찻잎 추천을 거절 당하고, 천천히 가라앉는 찻잎을 보면서도 자신의 마음에 무엇이 끼어 있는지 모른다. 정말 모르는 상태다. 그의 마음엔 물에 닿자마자 녹아 내려 섞이는 가루의 시간이 아니라 일정 시간 이상 우려내는 찻잎의 시간이 필요하다. 마음은 알고 있는 일을 해결하고 싶어서 그는 양을 살리려고 애쓴다. 이만 양의 일을 정리하고 나아가야 한다는 카이라의 말을 듣고도 일을 놓을 수 없다. 그렇게 찻잎이 물의 흐름을 따라 빙글빙글 도는 모양 같은 양의 기억 속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시간을 거치고 나서야 양을 가족으로 생각했음을 깨닫는다. 그건 그에게 양이 더는 비인간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해결 없이 넘어갈 수 있는 문제는 없다. 그게 ‘정리’라면 더욱 그렇다. 카이라는 양의 기억을 들여다 보고 자신의 기억을 재생한다. 불완전한 상태의 기억이 여러번의 수정과 맞물림을 거쳐 재생되지만 정확하지 않다. 안드로이드도 눈물을 흘릴 수 있는가. 제이크의 말을 따라 찻잔에 담긴 차를 한번에 마신 양의 내부에서는 관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카이라가 본 표정은 무엇일까. 그도 기억을 보고 나서야 양이 더는 하자 있는 물건이 아니게 되었나.
인간은 문득 생각이 떠오르고 자주 잊고 가끔 회상한다. 기억이란 제멋대로 편집된다. 양의 기억처럼 압축하고 압축을 해제하면 선명한 상태로 다시 보기가 제공되지 않는다. 똑똑히 기억나는 일도 그 기억이 정확하다고 확신할 수 없다. 눈앞에 있지 않기 때문에 말로 내뱉으면서 기억은 또 변형된다. 이미 거대한 기억의 바다에 빠진 이상 그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어진다. 그렇지만 다 기억한다고 슬프지 않고 불행하지 않고 더 행복하거나 기쁠 수 있을까? 양은 왜 새로운 집에서 행복하지 못했나. 양은 왜 오빠도 가족이라는 미카의 말에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웃었나. 왜 모든 걸 선명히 기억하는 존재면서 무가 있어야 유가 있다는 말을 했나.
양의 작동이 멈춘 것은 불량품이라 고장난 게 아니라, 스스로 중지한 것처럼 보인다. 존엄사를 택한 인간처럼. 평생 무를 지켜보며 남겨지던 입장에서 스스로 무가 되기로 결정한 걸지 모르겠다. 다른 기계들은 기억이 리셋되어 다른 집으로 옮겨 가지만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 양은 영원히 기억하는 자의 고통을 겪게 된다. 영원히 사는 자는 홀로 남는 자이며, 홀로 남는 자는 외롭다. 게다가 양은 모든 것을 기억하며 영원히 살게 된다. 닳지 않고, 소멸임에도 완전한 소멸이 아니며, 무이면서 동시에 유가 될 수 있으니까.
사실 여기까지 생각해서 행동했을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볼 수 있다면, 양이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는 장면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양이 자신을 인식하는 것과 기억으로 자신의 모습을 남길 수 있게 방법을 찾은 것. 마치 누군가 자신의 기억을 꺼내봐주기 바란 것처럼. 인간이 먼저 떠난 인간을 기억하기 위해 무덤을 만들고 추억을 회상하듯이.
미카는 양이 작동을 멈추기 전과 후가 거의 동일한 인물인데, 신기한 점은 그는 양의 기억을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미카에게 양은 처음부터 내 고향을 이해하기 위한 로봇이 아니고 가족이었으니까. 고장에 슬퍼하고, 방법을 찾아 다니고 싶어하고, 중심부가 열린 상태로 누워있는 양을 그저 달려가 안아주고, 그를 위해 바이올린 연주를 하고. 제이크와 카이라는 양의 기억을 보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자신의 마음을 미카는 새롭게 깨달을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그의 과거와 생각을 볼 필요도 없다. 보지 않아도 떠오르는 추억이 있으니까. 우리가 우리를 기억하는 방법처럼 동일하게. 카메라로 찍어 남기는 기억이 아니라 머릿속에 저장되어 불완전하지만 불쑥 떠오르고 느낌으로 남아있는 추억의 상태로. 그렇게 오래 남아 지워진듯 하면서 종종 생각나다가 다시 잊고 어느 날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나를 만들고 나를 이루는 기억. 그렇게 미카의 일부가 되어 양은 존재한다.
어느 날, 포스터를 유심히 관찰했는데 누구도 서로를 보지 않는데 미카는 마치 양을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흐릿한 상태의 양을 곁눈질로 보고 있는 듯한 미카는 양손으로 양의 손을 잡고 있다. 무의 존재가 되어가는 양을 온전히 스스로의 기억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미카뿐이라서 인가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삶은 그 자체만으로 아름답고, 우리의 존재 가치는 증명할 필요 없이 이미 주어진 것이고, 우리는 서로를 재고 따지는 데에 낭비할 시간이 없으며, 굳이 완전할 필요도 없다는 것. 불완전한 기억 속에 서로가 서로를 머금은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처음 이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사운드트랙 앨범을 순서대로 들었다. 버스 의자 위로 빛이 나무에 가려졌다 나타났다 하며 반짝거렸고, 창밖에는 불이 들어오지 않는 가로등이 나뭇잎 사이에서 그림자 없이 있었다. 다리를 지나갔고, 다리 위엔 차들이, 그 아래에도 차들이 나를 지나쳤다. 선명히 눈에 들어오던 순간들이 점점 흐릿한 상태로 기억된다. 그럼에도 생각난다. 그리고 자주 떠올린다. 다시 양의 기억을 플레이하기 위해 들어선 극장 안, 새로 보는 것만 같았던 장면들, 여전히 좋았던 부분과, 잊지 않고 그대로 생각나던 악센트.
기억이란 나를 살게 하는 동시에 나를 죽게 만들고, 죽게 만들던 기억들은 사라지고 그저 그런 기억들이 나를 살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 거창한 기억을 제외하고도 다양한 기억들이 불쑥 떠올랐다가 찻잎 가라앉듯이 사라진다. 그러면 나는 그 우려난 차를 찻잔에 따라 한입에 들이키고는 숲은 모르겠고 고추장이 생각난다고 말해버린다. 기억이 추억이 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