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브 마이 카>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2021.12.23
179분
이 시대 사람들은 짧고 자극적인 것을 원한다. 드라마나 영화를 직접 관람하기보단 유튜브로 요약본을 찾아 보고, 두꺼운 책은 읽지 않고, 각종 sns에 올라오는 릴스나 틱톡에 빠져있다. 이런 시대에 세시간의 러닝타임을 가진 영화라니. 엉덩이가 네모가 될 걱정을 하기 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관객만 입장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이 영화는 천천히 관객의 호흡을 영화의 호흡과 맞춰 그를 영화 끝까지 데려 간다. 내가 영화에 올라탔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천천히 부드럽게. 영화의 끝에서 엔딩 크레딧을 마주한 순간에 관객이 무언가가 일어났음을 느끼게끔 말이다.
이 영화에서 발화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계속해서 들리는 녹음보다 자동차가 가고 있는 도로, 풍경, 차 내부의 모습, 입을 다문 채 어딘가 바라보는 인물들의 시선만 더 보여주니까. 가후쿠의 연극에서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만나 서로 다른 언어를 쓴다. 대본 리딩에서도 하나의 언어로 통일하지 않고 타인의 언어를 배우라고 하지도 않는다. 그저 읽는다. 읽는 이의 감정도 전부 배제한 상태로 타인에게 나를 알리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타인이 나를 듣게 만든다.
박유림 배우가 맡은 이유나는 연극이 힘들지 않냐는 가후쿠의 말에 “내 말이 전해지지 않는 건 내겐 흔한 일이에요. 하지만 보는 것, 듣는 것은 가능하죠. 때론 말보다 많은 걸 이해하는 것도 가능해요.” 라고 말한다. 이유나가 수화로 말할 때 모두가 그에게 집중한다. 그의 언어를 알지 못해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고 그 기분은 맞아 떨어지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해는 말할 때가 아니라 들을 때 이뤄진다. 나를 보여주려고 애쓰지 않을 때 비로소 상대는 나에게 집중하게 된다. 가후쿠는 대본 리딩에서 대본을 읽고 다른 이에게 집중하라고 반복해서 말하지만 정작 스스로는 회피하는 사람, 듣지 않으려 하는 사람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 중요성을 더 알고 있는 사람이다.
오토의 외도를 알고 있었고 목격했지만 그는 말없이 집을 나와 모른 척한다. 그의 집에는 거실과 현관 사이 큰 전신 거울이 있는데 카메라는 거울 속의 인물을 자주 잡는다. 거울 바깥의 실재하는 인물과 거울에 비친 인물은 어떻게 다를까? 거울은 또 다른 자아를 말한다. 여기서 거울 속 가후쿠의 모습은 또 다른 모습이 아니라 한 번 걸러진 상태 (거울에 비춰진 상태) 에서도 자유롭지 못하고 그 안에 갇힌 모습처럼 보인다. (거울 프레임) 이 모습은 이후 그가 체호프의 연극을 준비하며 얻은 숙소의 개방되고 넓은 창, 그 바깥의 물가와 대비된다. 직선의 건물들과 집, 풍경에서 벗어나 도로 주변의 자연과 눈처럼 보이는 쓰레기 매립장, 그리고 이어진 바다, 평화공원 등은 그가 대본리딩을 하는 모습과 또 이어진다. 건물 내부에서 직사각형의 책상으로 만든 직사각형 모양으로 둘러 앉아 딱딱하게 글만 ‘읽는’ 장면과 공원으로 나와 아치형으로 나란히 앉아 자유로운 연기를 보는 장면. 후자에서 '무언가가 일어난다'는 것은 관객인 우리도, 가후쿠도 알게 되는 사실이다.
나와 너가 서로를 인지하고 들을 준비가 되어있더라도 맞닿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가후쿠는 듣는 것의 중요성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그 다음을 알지 못했다. 그 안을 달리는 것은 가후쿠의 빨간 자동차. 그 운전자인 미사키가 그의 말을 듣는다.
그 차에는 여전히 오토의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가 있고, 세월이 있고, 기억이 있다. 그 공간에 새로운 인물 미사키가 들어가면서 차는 다른 형태로 가후쿠에게 닿게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는 내 호흡에 맞춰서 이야기했을 때 딱 떨어지며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디가 맺음말인지 모르는 상태로 말이 겹치기도 하고, 그래서 책상을 한 번 치는 액션이 필요하기도 하고,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그 언어를 어색하게 따라하기도 해야 한다. 삶은 정해진 대사와 상황과 있고 끝이 정해진 연극이 아니니까. 오히려 끝이 어딘지도 모르게 흘러가다가 끝나고, 그 정적 또한 불편함이 없는 게 오히려 우리가 원하는 거니까.
나를 알아야 타인도 이해할 수 있다. 백미러 너머로 서로가 보인다. 거울은 마주보지 않고도 거울에 비친 다른 사람을 볼 수 있다. 그 거울로 그 사람도 나를 볼 수 있다. 가후쿠가 보던 거울 속에는 가후쿠는 없고 오토만 있었으나, 가후쿠의 마이 카, 그 자동차 안에 백미러에는 뒷좌석에 앉은 가후쿠와 운전석에 앉은 미사키가 서로를 볼 수 있다.
다카츠키와의 만남 이후 가후쿠는 처음으로 조수석에 앉는다. 가후쿠가 뒷좌석에서 조수석으로 가는 며칠 동안 가후쿠, 미사키, 그리고 가후쿠와 미사키 사이에서 무언가가 일어났다. 그 불분명함이 가후쿠가 나란히 앉게 만들고, 아끼던 차 안에서 담배를 나눠 피게 만들고, 그 담배를 선루프 위로 함께 내밀어 들고 있는 순간을 만들었다. 이제 가후쿠의 빨간 차는 이전의 공간에서의 빨간 차와는 다른 차가 된다. 사실은 미사키가 운전기사가 된 이후부터 그랬다.
이 영화에서는 다양한 언어로 다양한 사람들이 말을 나눈다. 그러나 어떤 깨달음의 지점은 말이 오고가기 이전에 이미 이뤄진다. 말은 그 이후에 가닿게 되는 것이다. 발화하게 되는 것은 깨달은 이후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 영화가 한 장면 한 장면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탑을 관객에게 건네면 영화관을 나오는 길에 세 시간의 길이를 이해할 수 있듯이, 이들의 말들과 표정, 정적, 순간의 공기, 목소리의 흐름이 그들에게 차곡차곡 쌓여 서로를 이해하고 나를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잘라낸다면 잘라내어 길이를 줄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는 순간, 이야기의 흐름이 뭉개져 타인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고 나의 대사조차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던 대본 리딩 장면이 우리에게도 똑같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건 진정한 소통과 이해가 아님을 우리는 이제 안다.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세상에 가서 얘기해요. 우린 고통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그리고 아저씨와 나는 밝고 훌륭하고 꿈과 같은 삶을 보게 되겠지요. 그러면 우린 기쁨에 넘쳐서 미소를 지으며, 지금 우리의 불행을 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드디어 우린 평온을 얻게 되겠지요.”
이 영화는 그렇게 이유나의 손짓과 표정을 빌려, 체호프의 연극 대사를 빌려, 새하얀 눈밭과 차가 지나는 무수히 많은 길, 입보다 많은 말을 하고 있는 눈으로 하고 싶은 말을 전부 전한다. 삶은 언제나 타인이 존재하고, 타인을 이해해야 내가 있고, 이 삶을 무수히 많은 이들이 거치며 깨달아 왔기 때문에 인용을 하게 되고. 이렇게 생각하면 그 연극에서 다카츠키가 빠진 진짜 이유도 알 것만 같다. 다카츠키는 소통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이해하지 못한 자는 다른 이를 이해시킬 수도 없다.
가후쿠와 미사키는 무언가 일어난 순간을 지나 실재하는 형태로 서로를 마주하며 비로소 온전히 이해한다. 내가 이해한 것은 너이기도 하고, 나이기도 하고, 우리이기도 하다는 것을. 미사키는 가후쿠의 연극을 보고 다시 무언가가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는 또 다른 내가 되어 살아가고,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지나갈 것이다. 이유나 역할을 연기했던 박유림 배우가 인터뷰에서 말한 안미옥 시인의 <생일 편지>의 한 구절처럼, ‘너는 무서워하면서 끝까지 걸어가는 사람’이니까. 그건 소냐와 유나이기도 하고, 이제는 미사키이기도 한 것 같다. 그건 또 우리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말보다 먼저 도착한 마음으로 눈빛으로 그게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