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펭돌 Jan 07. 2024

이름의 그림자엔 마음이 있다

<괴물>


영화 <괴물>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2023. 11. 29

127분




태어난 모든 것들은 이름을 가진다. 나만의 이름을 가지지 않은 것들도 포괄적인 단어로 명명된다. 사오리는 사오리라는 이름을 가지지만 싱글맘, 미나토의 엄마, 세탁소 직원, 마을 주민 더 넓게는 일본 사람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렇게 호명되며 한 명의 개인으로 꼿꼿하게 서 있는 동시에 사람이라는 울타리 안에 소속되어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명명이라는 건 그런 힘을 가진다.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포괄적일수록 그 공백만큼 우리의 무의식이 들어가 더 큰 힘을 지닌다. 이를테면 '괴물'이라는 단어가 가진 힘 말이다.


영화 <괴물>은 영화는 그 어떤 사전 지식이 없어도 보기 전부터 관객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괴물은 누구인가?' 관객은 괴물을 찾을 준비를 마친 상태로 영화관에 가게 되고, 그 기대에 걸맞게 영화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게 흘러간다. 소방차 소리는 그 경고처럼 느껴지는 동시에 시점마다 모든 일은 결코 하나로 단언할 수 없다고 알려준다. 우리는 흐름에 따라 첫 번째 괴물로 호리 선생님을, 두 번째로는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학교 선생님들, 호리 선생님의 여자친구, 미나토를 의심한다.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마주한 세 번째 시점. 그 안에서 관객은 점점 커져가는 괴물이라는 단어 아래에서 내면의 폭풍을 마주하며 자신에게 묻는다.

'괴물은 누구인가?'


<괴물>이라는 제목 아래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건 많다. 나라는 괴물, 너라는 괴물, 우리라는, 사회라는, 알 수 없는 ... 가능한 모든 괴물. 그런데 만약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정말 괴물밖에 없다면, 나에게 마음 한쪽을 내어주고, 떨어진 실내화 가방을 주워주고, 야간작업을 도와주고, 과자를 나눠주고, 사랑을 알려주는 이는 대체 누구인가? '괴물' 같은 건 그럴 수 없는 존재 아닌가? 그 어떤 좋은 면도 없이 나쁘고 어둡고 사악하고 해롭기만 한 존재 아닌가? 하지만 우리 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한 가지 면만 가지고 있지 않듯이, 괴물인가 싶은 이들도 괴물이기만 하진 않다. 애초에 괴물이라는 것은 상대가 아닌 내가 부르는 것이니까.

미나토와 요리는 터널 너머 버려진 기차 안에서 카드 놀이를 한다. 무작위로 집은 카드를 이마에 대고 서로 질문하며 자신이 들고 있는 카드가 무엇인지 맞히는 놀이다. 몇 글자로 정의 내릴 수 있는 단어를 찾기 위해 그걸 표현할 수 있는 설명을 한다. 하늘을 쳐다볼 수 없는 돼지, 의외로 고급 요리인 달팽이 등. 그러나 나무늘보 카드를 든 미나토가 요리의 설명을 듣고 이렇게 묻는다. '나는 호시카와 요리군입니까?' 요리는 그저 웃는다.


내가 '아'하고 말하면 '아'하고 들리지만, 녹음해서 들어보면 내가 듣는 내 목소리와 다른 목소리의 '아'가 들린다. 난 그런 목소리를 가지지 않았는데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은 다 그런 목소리인 나를 들은 거다. 나는 그게 나의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모르고 살 수 있다.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하니까 들어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 나의 귀와 타인의 귀는 그렇게 다른 목소리를 듣는다.

누군가 가진 특징과 성격을 완전히 무시하고 넌 어떤 사람이다, 정의 내리는 순간 그는 그저 그런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 이전과 이후는 사라진다. 요리는 들판에 마구잡이로 핀 들꽃과 나무의 이름을 잘 알고, 놀림 받는 친구에게 똑같이 얘기하라고 강요받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학우의 괴롭힘에도 대응하지 않고 묵묵히 쓰레기를 치우고, 아버지의 이유 없는 비난에도 아버지는 나를 위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한다. 미나토는 학우들이 요리를 괴롭힐 때 당당하게 싫다고 얘기하지 못하지만 요리 아버지에게서 요리를 구하고 싶어 한다. 요리가 맨홀 뚜껑 위에 누워 고양이 소리가 들린다고 할 때 같이 누워 귀를 기울이고, 엄마가 꽃 이름을 다 아는 건 남자답지 못하다고 했지만 그런 요리가 남자답지 못하다고 놀리지 않는다.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남자다움과 싱글맘은 그렇다는 편견을 지니고, 내 식구는 챙기며 다른 사람 뒷담화는 쉽게 하고, 문제가 생기면 내 밥그릇 챙기기에 바빠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면서 누군가에겐 다정하고 친절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 영화 바깥의 우리도 스스로가 착한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단언할 수 있을까? 나는 누구에게나 같은 사람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납작한 단어 하나로 정의하기엔 사람은 조금만 시선을 돌려도 다른 사람같지 않은가. 같은 말도 내가 듣는 나의 목소리와 남이 듣는 나의 목소리는 다른 것처럼.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현재에서 나는 인물들을 다 모은 자리에서 질문을 던진다. 괴물은 누구냐고. 정적이 흐르고 잔뜩 어지럽혀진 카드 더미에서 한 장 골라 이마에 갖다 대며 새로운 질문을 한다. 이것은 여기에 있습니까? 모두 대답을 미루고 고개를 숙이는데 요리만이 아니라고 웃으며 말할 것 같다. 그럼 나는 다시 묻는다. 이것은 괴물이냐고. 아닌 동시에 맞다고 한다. 누구나 괴물이 될 수 있는 동시에 아닐 수도 있으니까.

태어난 모든 것은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다. 하지만 이름의 뜻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며 여러 수식이 덧붙여진다. 그 모든 수식은 한 사람을 향하지만 다 다른 시선으로 모여 함부로 하나로 요약할 수 없다. 나는 이런 사람인 동시에 그런 사람이 되곤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저런 말이 덕지덕지 붙은 상태론 그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그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하고, 밥을 나눠 먹고, 같은 방향으로 달리며 같은 곳에 귀 기울여야 그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있다. 그제야 그 사람은 이름 그대로 불린다. 단어의 공백은 그렇게 채우는 것이다. 다른 누구의 무엇도 아닌 그 사람 자체로, 나만의 의미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포기하는 순간 괴물은 쉽게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건 다른 이도 나를 이해하기 포기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나는 과거의 괴물이었을 수 있고, 미래에 괴물이 될 수도 있고, 사실은 지금 누군가에게 괴물일 수도 있다. 아니, 괴물은 그저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만든 허상일 수 있다. 언제 얼마큼 닥칠지 모르는 태풍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불안에 떨어야 한다. 그 불안을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태풍으로부터 집을 보호하고 마을을 지키듯이 나를 보호하고 우리를 지켜야 한다.

무섭게 몰아친 태풍이 지나간 자리엔 여러 재건 작업이 필요하다. 하지만 부러진 나무와 꽃은 많은 시간이 들더라도 스스로 치유해 다시 자란다. 네모난 건물과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을 거쳐 이리저리 구르고 다친 우리는 가장 처음으로 돌아가 답을 찾는다. 초록이 햇빛에 부서지는 우리 모두가 공평하게 같은 높이에 서서 뛸 수 있는 곳으로. 그곳엔 그림자가 그늘이 되어 뙤약볕에서도 우리를 지켜준다.






작가의 이전글 나를 들여다보는 눈앞에 서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