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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마무라 Feb 09. 2024

"여류 작가"라는 말은 정말 금지되어야 할까?

삶과 예술에 있어서의 페미니즘

보부아르 그리고 페미니즘

“여류 작가”라는 말은 현대 문학계에서 암묵적으로 금지되었다. 내가 알기로 그 금지는 페미니즘 사상의 일환으로서 문학계에서도 “작가”만이 존재하지 그 뜻이 남자만을 지칭해서는 안 된다는 영향력 있는 주장의 연장선에서 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이 작품을 읽기 전에 그것이 여자에 의해 쓰였느냐, 남자에 의해 쓰였느냐에 따라 독서 경험과 작품 해석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작가의 성별에 따라 몰입의 방식을 달리한다. 

몇 해전 오스카 시상식에서 사회자인 크리스 록이 이런 말을 농담조로 한 적이 있었다. 

도대체 연기에 남녀 구분이 어디 있냐. 우리는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으로 상을 나눌 것이 아니라 그냥 best actor을 뽑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의견에 의구심을 갖는다. 여자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젠더다,라는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극좌파 성향의 의견이 매력적인 것은 일부 인정하나, 그 반대로 생물학자라든지 심리학자 같은 과학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인간에게 거역할 수 없는 ‘본성’이라는 측면이 존재하고 이에 연장선으로 남자에게도 남자 고유의 본성, 여자에게도 여자 고유의 본성이라는 생물 혹은 심리 혹은 뇌 과학적인 특성이 있음을 주장한다. 

뭐, 나는 어느 한쪽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럴 만큼 내가 그 분야에 통달한 것도 아니고 그런 생물학이든 사회 정치 이론이든 내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애써 개인적인 의견을 표출하자면, 나는 적어도 예술 활동에서 – 그것이 문학이 되었든, 연기가 되었든, 작곡이 되었든 – 남성이 보이는 기질과 여성이 보이는 기질은 극명한 차이점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오해하지 말아 주시길. 그레타 거윅이라고 “오펜하이머”를 못 만들 것도 없고 크리스토퍼 놀란이라고 “바비”를 못 만들 것도 없다. 그러나 여성으로서 혹은 남성으로서 살아온 다년간의 경험 그리고 성이라는 본능이자 우리가 운명 지어진 한계가 부여하는 특수한 정조(情調), 그런 것들이 예술관에 그리고 작품에 녹아든다고 생각한다. 

사실, 인간은 한계 지어진 조건 안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그 명제가 철학의 최초이자 궁극적인 깨달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알기로 철학사 이래 인간은 공평무사한 객관적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한 학자는 극히 적다. 남녀 구별을 떠나 제삼자의 눈을 가진 사람은 아마도 신이거나 우리가 아는 인식구조를 가진 인간을 넘어선 신인류일 것이다.

페미니스트의 시초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는 시몬 드 보부아르같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명제를 믿으며 동물로서의 성(sex) 보다 사회적 성(gender)이 만연함을 지적하면서 “나는 나를 내 ‘선택’대로 규정할 수 있다”라고 주장한 학자들은 사실 철학 사조에서 예외적 이단아이다 (나쁜 의미로 적은 게 아니다.)

경험의 조건을 최초의 심리학적 시도로서 제시한 흄의 “인간본성에 관한 논고”에서부터 시작해 인간은 감성과 지성의 한계 내에서만 생각할 수 있다는 칸트의 주장으로 이어진 주류 사조는 인간 본성에 따라 사고가 규정지어질 수밖에 없다는 현대 과학자 예를 들어, 스티븐 핑커나 조너선 하이트, 브렛 와인슈타인 등과 같은 사람들로 이어진다. 

브렛 와인슈타인의 해임 요구 운동을 하는 Evergreen State College 학생들

참고로 브렛 와인슈타인은 201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완전히 좌파 계열로 넘어간 미국 대학 – 특히 사회 인문학 관련 학과 - 의 치하 아래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암수는 성에서 비롯된 서로 상이한 본성을 갖는다는 주장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학생들과 교직원들에게 질타를 받으며 교수직을 해임당했다. 스티븐 핑커의 베스트셀러 “빈 서판”은 로크의 “인간 본성은 없으며 인간은 태어날 때 흰 도화지로 태어난다”라는 당대의 분위기에 비추었을 때 급진적이고도 매력적인 사상을 반박하는 책이다. 이 책은 논쟁도 많았으나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국내 대학 도서관에만 가도 스무 권 넘게 구비되어 있는 고전 반열에 올랐다. 조너선 하이트의 주장들은 우리가 사고 판단을 내릴 때 이성에 앞서 흄이 지적했던 감정에 의해 매몰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한 긍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엄 촘스키의 언어습득이론에 관한 주장에서도 이와 같은 결을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칸트의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은 촘스키는 보편 문법이라는 것이 인간 본성에 내재되어 있어 아기들이 그것이 독일어가 되었든 아랍어가 되었든 일본어가 되었든 선천적으로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고 말한다. 

하물며 인간을 규정짓는 제1 경계선인 성이 우리의 지적 판단, 그리고 그 너머의 예술 행위에까지 미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여류 작가”라는 호칭이 단지 제인 오스틴적인 18세기 ‘코르셋 여성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인상을 불러일으킨다면 나도 그 호칭의 사용이 꺼려지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여류 작가”가 정의 그대로 문필에 종사하는 여성이라면 남성주의적인 전통 문학계에 고유한 여성성의 “흐름”을 불어넣어주는 보다 특수한 칭호로 연명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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