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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aneur May 12. 2024

비비드 네온사인, 홍콩

자유라는 빛의 산란

여행자라면 누구나 시간을 꾹꾹 채워서 놀고 싶을 것이다. 홍콩의 성수동이라는 셩완에서 센트럴로 넘어가는 중, 여행지에서의 마지막 금요일 밤이 지나갈까 봐 마음이 급하다. 오늘 밤을 끝내주게 즐겨야 하는데. 하늘을 보니 아직 늦은 시간은 아닌 것 같다.

"지금 몇 시야?" 핸드폰을 보는 동행에게 묻는다. "9시 반!"

해가 지고도 남은 시간인데, 센트럴로 향하는 하늘은 아직 밝기만 하다. '잠들지 않는 도시'라는 건 이런 건가?


잠들지 않는 홍콩의 밤하늘을 발견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화양연화>, <중경삼림>의 촬영 감독 두가풍(Christoper Doyle, 오스트레일리아 출신)도 처음 홍콩의 네이선로드에 갔을 때, 블랙이 아닌 홍콩의 밤하늘을 보았다. 습한 날씨로 인한 뿌연 구름과 안개가 네온사인으로 물들어 새로운 분위기를 자아냈고, 중국어를 하나도 모르던 그는 이런 모습에 매료되어 그때부터 홍콩을 배워가기 시작했다. 이후 카메라에 네온사인의 빛을 담아 많은 이들의 향수가 서린 그런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밤 10시에 가까운 시간에도 밝은 홍콩 밤하늘


강렬한 빨간색, 시리도록 파란 블루, 누구보다 화려한 진홍색은 한데 모여 공작새처럼 자기 색을 뽐내고, 지어진 지 100년씩은 거뜬히 넘은 빈티지한 건물들은 눈부시게 빛나며 밤거리를 장악하는 네온사인의 불빛들로 물들어 낮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알 수 없는 한자와 영어가 뒤섞여 전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의 다양한 언어를 함께 듣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곳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홍콩의 밤거리이다.


6년 전 처음 홍콩에 왔을 때, 란콰이퐁에서 느꼈던 이국적인 홍콩의 밤거리를 잊기 어려웠다. 중국 문화에 대해 한평생을 공부하던 누군가는 홍콩을 '제3의 장소'라고 했던가. 형형색색의 네온사인으로 물들어가는 홍콩의 밤거리를 보고 있노라면, 내가 중국도 영국도 아닌 그 '제3의 장소'에 와있구나. 하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문득 6년 전 왔던 홍콩보다 어딘가 모르게 덜 이색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많은 네온사인이 LED 간판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홍콩의 밤거리가 그것만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는 네온사인의 역할이 8할 이상이다. 이 크고 작은 네온사인 덕분에 홍콩의 야경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그 유명한 홍콩의 수많은 영화들도 네온사인을 바탕으로 촬영됐다. 그런데 이토록 중요한 문화적 심볼인 네온사인이 왜 사라지고 있을까?

홍콩 밤거리의 화려한 네온사인 (출처 : 霓虹的製作 The Making of Neon Signs | NEONSIGNS.HK 探索霓虹)


먼저 네온사인의 제작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네온사인의 화려한 외관과 상업적인 용도와는 다르게, 제작 과정은 굉장히 숭고하며 장인정신을 요하는 일종의 조형예술활동이다. 

일단, 캘리그래퍼가 네온사인에 사용될 서체를 디자인한다. 서체 스타일은 비즈니스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 무술 클럽이나 스포츠 클럽은 강렬한 인상을 주는 북위 스타일을 선호한다. 반면, 레스토랑은 심플하고 캐주얼한 흘림체를 선호한다. 캘리그래피는 그래픽 툴이 아닌, 손작업으로 그려진다. 대부분이 캘리그라퍼가 아닌 서예가라고 불러야 할 정도의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 많으며, 이들은 눈대중으로 정확한 네온사인의 규격에 맞춰 문자를 그려낸다.

문자를 한 줄로 할 것 인지, 두 줄로 할 것인지도 네온사인 디자인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단선'으로 할 경우, 간판에 할당된 면적이 작은 네온사인에 적합하며, '이중선'으로 할 경우, 블러효과가 생겨서 불빛이 더 강렬해진다. 만약 대문자에 '단선'을 넣어야 하는 경우라면, 약간 허전해 보일 수 있으므로 문자 안을 채우는 선을 그려 넣어 더 화려하고 강조되는 네온사인을 만들 수 있다.


네온사인 제작 과정 (출처 : 霓虹的製作 The Making of Neon Signs | NEONSIGNS.HK 探索霓虹)
네온사인 제작 과정 (출처 : 霓虹的製作 The Making of Neon Signs | NEONSIGNS.HK 探索霓虹)


캘리그라퍼의 스케치를 건네어받은 네온사인 장인들은 그 위에 가스불을 켜고, 얇은 유리봉을 이리저리 구부려가며 한자 모양을 만들어낸다. 이 작업은 자칫하면 다른 유리봉끼리 붙거나 녹아버려서 새로 해야 할 수 있으므로, 적당한 타이밍과 힘 조절을 할 줄 아는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물론 불, 가스, 유리가 사용되는 일이니 안전에도 만전을 기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한자 모양이 만들어졌다면, 밤거리를 물들일 색을 불어넣을 차례이다. 네온사인은 유리튜브에 넣는 기체의 종류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는데 네온은 주홍색, 수은은 청록색, 산소는 오렌지 빛, 질소는 노란빛이 나온다. 홍콩의 장인들은 이 중, 빨간빛을 내는 네온과 파란빛을 내는 아르곤만 사용한다. 나머지 색은 유리봉안에 색 가루를 묻혀 낸다. 예컨대, 파란색 분말을 파르고 네온으로 유리튜브를 채우면 핑크빛을, 녹색 가루를 바르고 네온으로 유리튜브를 채우면 주황색이 된다. 원하는 색의 가루를 바른 후, 유리관 안으로 가스불을 지피면, 우리가 홍콩 밤거리에서 볼 수 있는 네온사인이 완성된다.


네온사인에서 낼 수 있는 빛 (출처 : 霓虹的製作 The Making of Neon Signs | NEONSIGNS.HK 探索霓虹)


네온사인이 단지 간단한 몇 번의 컴퓨터와 기계 작업을 마치면 만들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모든 과정이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는 일이 없었고, 아주 작은 프로젝트라 하더라도 라이센스가 필요하다. 라이센스를 취득하더라도 숙련된 기술로 작품을 만들어내기까지는 10년이 넘는 긴 시간을 수련해야 한다. 하지만, 더 이상 이 긴 세월을 견뎌낼 젊은 이는 없다. 네온사인의 수요가 없기 때문이다. 한 때 12만 개에 이르던 네온사인은 500개까지 줄어들었으며, 10명 남짓 남은 장인들 마저도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갔다. 홍콩 건설부가 간판에 대한 안전 규제를 강화하면서 유효성 검사를 통과하지 못한 녹슨 간판 등을 철거했고, 남은 네온사인에 대해서도 까다롭고 비용도 만만치 않은 허가를 받아야 유지할 수 있다. 실상 네온사인을 없애겠다는 지침이다.


한 나라의 정체성을 없애는 가장 빠른 방법은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홍콩의 네온사인 간판은 단순한 간판의 의미를 넘어서, 홍콩의 문자와 자유로운 밤거리 문화를 담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네온사인의 불빛 아래에서라면, 누구나 <타락천사>의 킬러, <중경삼림>의 경찰 663이나 샐러드 가게 알바생이 되어 8,90년대의 홍콩을 여행할 수 있다. 텅스텐(백열구) 빛보다 차갑고 강렬하여 보는 이의 가슴에 빠르게 파고들어 진한 잔상을 남기는 이 불빛은 장소를 물들이며 우리를 새로운 공간으로 데려다 주기 때문이다. 전 세계를 통틀어 이토록 빠르고 매섭게 파고드는 불빛은 없을 것이다. 홍콩인들도 이런 네온사인이 사라져 가는 것을 아쉬워하며, 박물관에 철거되는 네온사인을 수집하여 전시하고 있다.


 LED전광판으로 대체된 홍콩 간판 (출처 : 霓虹的製作 The Making of Neon Signs | NEONSIGNS.HK 探索霓虹)


LED로 대체된 홍콩의 밤거리는 경제적으로 효율적 일지는 몰라도 그 모습 자체가 플랫해졌다. 실제로 옆에서 보는 그 모양 자체가 판판하기도 하고, 전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밤거리가 되어 문화적으로도 밋밋해지고 있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개성을 갖는다는 것, 나만의 색을 유지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최고의 효율성을 알면서도 조금은 돌아가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오랜 시간과 공을 들여 만든 것은 그만큼 깊은 인상과 잔상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렇게 오래도록 홍콩의 전성기에 대한 향수가 오래 회자되는 이유가 아닐까?


두가풍 감독은 사라져가는 네온사인에 대해 아쉬워하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폴라로이드처럼, 필름영화처럼, 어떤 방식과 형태로든 다시 돌아올 것이다. 아마 나처럼 많은 이들의 가슴에 차갑고 강렬하게 박혀서 오랫동안 그것을 그리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당장은 사라져만 가는 이 불빛과 자유의 밤이 아쉬워서, 더 많이 눈에 담고 느끼며 홍콩의 밤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사라져가는 네온사인 (출처 : 霓虹的製作 The Making of Neon Signs | NEONSIGNS.HK 探索霓虹)




참고 자료

霓虹的製作 The Making of Neon Signs | NEONSIGNS.HK 探索霓虹

Christopher Doyle: Filming in the Neon World 杜可風:霓虹光影 | NEONSIGNS.HK 探索霓虹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108849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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