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를 놓아주는 순간 보이는 또 다른 세계
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며, 책을 완독하신 후 읽으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어려운 책은 아니다. 광범위한 분야의 개념들이 등장하지만 그 깊이가 얕고, 작가의 뛰어난 문장력 덕분에 막힘없이 읽힌다. 그러나 다 읽은 후엔 각 내용의 연결점이 희미하고 잘 정리되지 않은 느낌이 드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따라서 이 리뷰에서는 글의 구조와 그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가시화하여 독자들의 이해와 정리를 돕는 것이 필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서술했다.
간단히 요약해 보자. 현실의 삶에서 이별이라는 혼돈에 직면한 작가는 '혼돈 속을 헤쳐 나가는 동력'을 알고 싶은 마음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을 연구하게 된다. 그는 어떤 혼돈에도 굴하지 않고 질서를 향해 나아갔던 저명한 분류학자이다. 그렇게 밝혀낸 그의 동력은 자기기만이라는 '긍정의 방패'. 그러나 작가는 여기서 끝내지 않고, 그 방패의 역효과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확신에 찼던 그른 신념은 범죄와 우생학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작가는 우생학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통해 혼돈과 질서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이를 통해 막혔던 삶을 뚫고 나간다.
* 아래의 세 가지로 분류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는 판단 하에 그렇게 나누었다.
1. 자신과 데이비드의 삶
겨우 얻은 애인과 안정이라는 질서에서 다시 혼돈으로 돌아간 작가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혼돈에 빠졌지만 끊임없이 전진하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불굴의 의지에 감명을 받고 이 인물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다. 이 부분에서는 데이비드의 삶의 굵직한 이야기들을 다루는 위인전 형식과 답을 찾기 위한 작가의 여정을 담은 회고록 형식을 교차하며 보여 준다.
결국 작가가 원하던 답의 주된 내용은 데이비드의 긍정적 자기기만이었다. 즉 자신이 하는 일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존경하는 학자 루이 아가시로부터 분류학의 중요성을 들은 것을 계기로 데이비드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강한 신념과 확신을 가지게 된다. 또한 데이비드는 어떤 운명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자기기만과 실존적 믿음이 데이비드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데이비드를 몰고 가는 지나치게 확고한 신념과 목적의식은 후술할 끔찍한 일들로도 이어지게 된다.
2.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행실과 사상에 대한 비판적 검토
데이비드의 광기에 가까운 목적의식이 어떤 일까지 벌어지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다룬다. 먼저 데이비드가 제인 스탠퍼드의 살인과 깊이 연루되어 있음을 의심할 수 있는 여러 정황을 보여 준다. (추정되는) 살인과 그 은폐의 과정을 통해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방법이라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준다.
다음으로 그가 우생학의 열렬한 지지자이며 그 보급에 앞장섰다는 사실을 밝힌다. 분류학자였던 데이비드는 물고기뿐만 아니라 인간의 형질에 대해서도 위계를 나누었던 것이다. 데이비드는 인간 종 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부적합자'들을 그 세대에서 끝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는 노숙자, 장애인 등에 대한 불임 시술 합법화까지 이어졌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과 루이 아가시의 사다리가 합쳐진 끔찍한 결과였다. 이 부분에서 작가는 우생학의 도덕적, 과학적 문제점을 지적하고 20세기의 그 실상을 밝힌다. 그리고 이러한 '분류'의 문제와 맞물리며 후술할 작가의 깨달음이 등장한다.
3.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의 말미에 등장하는 이 부분에는 주제가 가장 강력하게 드러나며, 조금씩 다른 내용이지만 우생학적 관점에 반대되는 내용들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할 것이다. 중요도는 유전적 요인이 아닌 관점의 차이에서 온다는 것, 혼돈일 뿐인 세상에서 분류로 인한 폭력은 물론 분류에 대한 확신도 없어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혼돈 속에서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가는 '우리는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민들레는 잡초가 되기도 약초가 되기도 한다. 즉 관점의 차이이다. 너무나 복잡한 생물들이 혼돈 속에서 맞물리며 살아가는 이 세상을 우생학은 적합, 부적합이라는 하나의 관점을 통해서만 바라본다. 하지만 이런 데이비드의 우생학으로부터 부적합 판정을 받은 애나와 메리는 서로에게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었다. 두 사람의 따뜻한 모습은 그 자체로 우생학의 단일 관점에 대한 비판이며, 작가의 유년기부터 자신을 오랫동안 사로잡아 왔던 허무주의가 부서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어류라는 터무니없는 분류 체계가 드러내는 결함에 대해 다룬다. 인간의 편의라는 명목으로 혼돈 위에 그어진 선들을 갈가리 찢어 놓는다. 그리고 이건 앞선 장에서 부정적으로 묘사한 조던에게 날리는 가장 강력한 한 방이기도 하다. 그가 평생을 바쳐 분류한 어류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를 둘러싼 건 분명한 혼돈이다. 혼돈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아는 한, 우리는 혼돈과 함께 살아가야 할 것이다. 혼돈과 살아가는 방법은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이다. 지금의 분류가 타당한지, 직관에 지나치게 의존한 것은 아닌지, 물고기는 어류인지... 우리의 분류와 인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작가는 우리가 편의를 위해 찍찍 그어 놓은 어설픈 선들 너머를 볼 것을 요청한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무엇을 잘못 알고 있을까?'
이렇게 얻은 깨달음이 작가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작가는 인간이 만든 이성애자, 동성애자라는 구분을 넘어 진짜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생각할 있게 되었다. 작가가 얻은 깨달음은 아이러니하게도 처음 추구했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사상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었지만, 이를 통해서 자신이 마주한 혼돈을 극복해 나가게 된다.
사실 우리는 편의를 위해 끊임없이 분류한다. 바퀴벌레는 '해'충, 곰팡이는 나쁜 것.. 분류는 인간의 낡은 본성일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 분류는 필수불가결하다. 또한 분류는 살아감에 있어서 매우 유용한 도구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류의 단일기준을 받아들이는 순간, 다른 생각은 할 수 없게 된다. 잠재된 가능성은 죽어 버린다. 데이비드처럼 이름과 라벨을 붙이는 순간, 한 존재의 의미는 급격히 축소되는 것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이비드의 사례를 통해 우리가 규정해온 범주에 대한 성찰을 유도한다.
작가의 필력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갑자기 새로운 얘기를 꺼내면서도 독자의 흥미를 붙들어 놓는 것. 분류학자의 위인전에 사람들을 집중시키는 것. 뒤에 '흥미로운 것', '궁금한 것'을 항상 남겨놓는 것. 이런 능력 덕분에 다양한 이야기를 노련하게 풀어낼 수 있었고, 논픽션 정보 전달 구간도 무척 재미있게 읽힌다. 특히 데이비드의 동력을 찾는 부분에서는 작가와 함께 옛 기록을 헤집으며 찾아가는 느낌이었는데, 대단히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독자의 호기심과 주목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정말 뛰어난 문장력인 듯.
책의 결말 부분이 정말 아름답다.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남기며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나는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거기 그들이 있었다. 내가 그렇게 수없이 글로만 읽었던 존재들. 아직 내가 이름도 모르는 존재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들의 피부 아래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나와 훨씬 더 비슷한 내장기관이 있다는 것, 나와 똑같은 이온이 흐르고 있는 뇌가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류가 아니라는 것. 은빛 존재들 한 떼가 나를 향해 몰려오더니 잘하면 잡을 수도 있는 기차처럼 내 아래쪽에서 빠른 속도로 몰려다녔다. 나는 그 은빛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들은 갈라지며 나를 자기들 안으로 받아주었다. 수백 마리의 은빛 영혼들이 나를 감쌌다.'
참 다사다난했던 첫 서평이었습니다. 서평을 쓴다는 것은 책을 읽으며 직접 한 생각들과 참조한 여러 분들의 생각들을 이리저리 부수고 합치며 제 글에 녹여 내는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래도 책의 구성이 구성인지라 꽤 애먹었답니다. 첫 서평의 대상으로 이리도 특이한 책을 집어 든 자신이 종종 원망스럽기도 하였으나.. 되돌아보면 듬뿍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이 책에 대한 글을 쓰며 '평론이란 무엇의 전달을 목적으로 쓰여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됐습니다. 단순히 작품을 해설할 수도 있을 것이고, 제 개인적인 감상을 쓰거나 이런 방법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비판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요. 이런 축이 없으면 문장들은 힘을 잃고 비실비실 헤매게 됩니다. 고심 끝에 선택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 대한 이번 서평의 구성이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작품마다 제가 들려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다르기에, 매번 그 작품에 최적화된 주제와 구성을 고민하고 찾아나가는 것도 제 과제 중 하나가 되겠지요. 오늘도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도움이 많이 됐던 서평의 링크를 첨부합니다.
(울산저널 박가화 님)
https://m.usjournal.kr/news/newsview.php?ncode=1065608174296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