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눈과 귀를 사로잡고 마음을 울리는가
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며, 영화를 전부 감상하신 후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고 나면 '좋은 영화를 봤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 영화가 왜 좋은지를 명확히 설명해주는 글을 찾아보기란 힘들다. 각종 리뷰나 평론을 살펴봐도 줄거리를 요약하거나 '~는 ~를 상징한다'와 같은 해석을 늘어놓을 뿐이다. 이 영화의 가장 뛰어난 성취는 해석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무척 재미있다는 점인데 말이다. 필자는 모두에게 만족감을 주는 특정한 방식이 이 영화 속에 분명 존재한다고 믿었고, 이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이 리뷰에서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어떻게 관객들을 사로잡았는지에 대해 다룬다.
사진에 빗대어 생각해 보자. 물론 책상이나 의자와 같은 일상적인 소재도 예술적인 사진으로 담아낼 수 있지만, 그리스의 산토리니나 잉카 문명의 유적지와 같은 소재라면 감상자를 사로잡기는 훨씬 쉬울 것이다. 그만큼 예술에서 소재는 그 자체만으로 감상자의 집중도를 좌우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비일상성으로, 우리는 좀처럼 보고 접해보지 못한 소재일수록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소재는 어떨까? 이 영화는 다른 어떤 애니메이션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특별하고 신선한 소재들로 가득 차있다. 스크린을 채우는 것들 중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거의 없다. 평범한 건 주인공 치히로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소재가 하나같이 톡톡 튀는 특이성을 가지기에 일상적인 상호작용마저 관객의 이목을 사로잡고 지루함을 부순다. 오물신뿐만 아니라 오물신을 씻기는 거대한 온천도 흥미롭고, 가오나시뿐만 아니라 가오나시에게 사금을 받으며 환호하는 개구리와 민달팽이 직원들도 흥미롭다. 이처럼 비일상적 소재들로 이루어진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작품에 오락성을 더하고 우리의 관심을 화면 안에 붙잡아둔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영화를 즐기는 데에 소재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라는 것이다. 치히로의 부모님은 왜 돼지가 됐을까? 유바바는 어떻게 이름을 뺐는 걸까? 몸집이 불어난 가오나시는 왜 치히로가 준 경단을 먹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을까? 이해할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논리성이 결여돼도 즐기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점은 흥미로운 소재가 그 자체로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 주며, 이는 영화의 모든 씬에 비일상적 소재들이 투머치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마구 흩뿌려질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소재가 영화의 분위기와 오락성을 담당한다면, 주인공 치히로의 성장은 주제의식과 작품성을 담당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플롯은 발생하는 문제들을 치히로가 해결해 나가는 것의 반복이라고 볼 수 있다. 오물신과 가오나시, 하쿠와 관련된 문제를 전부 치히로가 직접 해결한다. 하지만 치히로는 고작 10살의 여자아이다. 그 때문에 각 문제는 더 크고 감당하기 어려운 과제로 다가오고, 해결 과정에서 보이는 치히로의 용기와 성장은 더욱 강조되며 관객들의 마음을 울린다. 문제 해결의 주체가 성인의 남자 주인공이었다면 어떨까? 강조되는 건 용기나 신념이 아니라 주인공의 능력일 것이다. 보통 이런 유형의 주인공에게는 '시도'가 아닌 '결과'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반면 어린 주인공은 시도하며 보여주는 용기와 신념만으로도 관객의 공감과 응원을 받을 수 있다. 즉 치히로는 용기 있는 시도를 통한 내적 성장을 보여주기에 최적화된 주인공인 것이다.
치히로는 신념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더 어려운 길이라도 항상 올곧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어린아이 주인공은 자신의 철학을 주장하지도, 의견을 관철하지도 않지만 자신이 진정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관객은 치히로의 예쁜 마음에 가슴이 따뜻해지고, 응원해주고 싶어 진다. 그 순수함에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아련함의 출처는 예쁜 마음을 가진 어린 여주인공이 아닐까.
작화의 퀄리티로 유명한 지브리인 만큼 이 영화에서도 극한의 작화를 보여준다. 유바바가 한 번 말할 때마다 얼굴의 주름이 몇 번이나 움직인다. 온천과 신들 디자인의 완성도 또한 높아 작화와 함께 영화 특유의 톤과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보고만 있어도 재미있을 정도로 애니메이션으로서는 정점에 다다른 수려한 영상미를 뽐낸다.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연출력은 이 영화에서도 어김없이 최고의 성취를 거뒀으며, 명불허전 히사이시 조의 음악도 작품과 완벽히 어우러지며 특유의 아련한 색채를 더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관객의 이목을 잡아끄는 흥미로운 소재들로 가득 차 있으며 이들은 영화의 오락성을 담당하고 특유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어린 여자아이 주인공 치히로의 성장 이야기는 주제의식과 작품성을 담당하고 공감과 감동을 이끌어낸다. 작화와 연출, 음악 등으로 대표되는 형식적인 측면의 완성도는 오락성과 작품성이라는 두 축을 든든히 받쳐줄 뿐 아니라 더 돋보이게 하기까지 한다. 관객은 보는 내내 신선한 소재들로부터 재미를 느끼고, 치히로의 용기와 신념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본 영화는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흠잡을 데 없이 완성되었다고 생각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끊임없이 관객을 즐겁게 하는(Entertaning) 영화다. 이목을 사로잡는 흥미로운 소재들 속에서 주제를 효과적으로 풀어낸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이며 강점이다. 물론 이 영화엔 수많은 상징과 비유가 사용되었다. 그 점을 부인할 수 없지만, 이 영화가 위대한 이유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왜 재미있는 영화인가'는 꼭 써보고 싶은 주제였습니다. 저도 그 이유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엔 참 좋은 영화라는 느낌이 만연했지만 이 영화가 도대체 왜 좋은지는 설명하기 어려웠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여러 평론과 리뷰를 살펴보았지만 원하는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전술했듯 영화의 내용 자체에 대한 분석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본 사람들은 남녀노소 이 영화가 매우 재미있는 명작 영화라고 말합니다. 이는 이 영화가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보편적인 엔터테이닝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미있는 것이 왜 재미있는지 모르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기에, 저는 이 영화 속에 담긴 특정 방식에 목말라 있었고 그게 이 리뷰로까지 이어지지 않았나 합니다. 오늘도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