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진눈깨비가 찝찝하게 내렸다. 평소라면 내가 눈도 좋아하고 비도 좋아하니까 눈과 비 그 어디쯤인 진눈깨비를 긍정할 수 있을 텐데, 어제 진눈깨비가 내린 양을 '찝찝하게'라고 형용한 이유는 단순하다. 어제는 우리 아파트가 분리수거를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우산을 쓰면 쓰레기를 들 수 있는 손이 하나 줄어 한 번 더 왔다 갔다 해야 하고, 우산을 안 쓰면 옷이며 머리며 다 젖을 테니 어제의 진눈깨비를 긍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제는 행복한 날이었다. 하루종일 논문 쓴다고 낑낑댔던 시간이 행복했던 것도 아니었고, 점심에 먹었던 고기와 라면 때문에 행복했던 것도 아니었다. 어제의 행복은 경비 아저씨와 나눈 짧은 인사 때문이었다. 먼저, 내가 분리수거를 하면 궂은 날씨에 조금이나마 더 일을 하시게 될 테고, 그래서 그렇게 건네시는 게 결코 당연하지 않은데, "안녕하세요"라는 아저씨의 인사에서 반가움이 느껴져서 좋았다. 그리고 그런 아저씨에게 내가 “수고가 많으세요. 늘 감사합니다”라고 인사에 대한 보편적인 화답보다 조금 더 마음을 담아 표현해서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인사 안에 담긴 ‘조금 더’를 알아주신 아저씨께서 마찬가지로 끝인사에 ‘조금 더’를 더하여 화답해 주셔서 좋았다.
사실 경비 아저씨의 인사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저씨는 무죄다. 어제는 아파트 주민들의 일주일치 쓰레기를 분리수거해야 하니까, 게다가 진눈깨비가 내렸으니까 그렇다. 그런데 저 짧고 사소한 순간이 한 사람의 하루의 행복으로 승화될 수 있었던 것은, 경비 아저씨께서 자신이 마주한 환경의 변론으로 얻을 수 있는 무죄선고를 넘어, 하지 않아도 욕먹지 않는 일을 안 하시지 않으시고 하셨기 때문이다. 당신께서 건넨 따스함은 오롯이 나만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것이 삶을, 세계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안 해도 되는데 하는 것, 그래서 오롯이 타자를 위하는 것, 그래서 누군가의 순간에 따스함을 안겨주는 것 말이다. 그 인사는 여전히 사소하다. 그리고 사소해서 보통 주제화되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순간을 깊이 사유하고, 공들여 글로 쓰니 그제야 일각 아래 숨겨진 빙산이 드러난다. 실로 대단한 인사였다. 다시 곱씹어 봐도 그 인사는 정말 대단한 인사였다. 나도 우리 경비 아저씨처럼, 주제화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이, 마음을 담아 안 해도 되는 것들을 마구마구 타자에게 건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