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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계절을 넘기기 어렵고, 한 해를 넘기기 어렵다

그렇게 한 세대를 교체한다

by 그리여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불러 모은다.

유난히 부고장이 많이 날아든다. 시간 앞에 나약한 인간은 하루하루를 그저 열심히만 사는데,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어떠한 일상이나 진실은 누구나 한 번은 맞이하게 되는 혹은 보게 되는 순간. 그것이 무엇이든지 우리는 조용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나쁜 소식이야 갔단다"

노을이 깔리던 오후에 이모에게서 한통의 전화가 왔다. 그동안 많이 아프던 사촌 새언니가 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다고 한다.

조카와 통화하면서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에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66살이라는 나이가 마음을 착잡하게 하였다.

어렸을 때 한번 봤다가 서울 올라오면서 또 잠깐 보았다. 사촌이라고는 하지만 왕래하면서 보는 것은 힘들었고 집안에 큰일이나 있어야 봤기에 볼 시간이 별로 없었다.

새언니는 몸이 안 좋았고, 사촌오빠는 항상 언니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그러다가 60살이 되던 해에 암으로 먼저 세상을 등졌다. 외롭고 불쌍하게 살다 간 사촌오빠가 아직도 가슴 한구석에 남아있다. 돌아가시고 얼마 안 있다가 음성 예약 문자가 왔었더랬다. "미안하다 오빠가 이렇게 먼저 가서.."라고 잔잔히 이어서 말하던 그 음성이 아직도 귀에서 울림을 준다. 그렇게 오빠가 가고 조카가 그 뒤를 이어 새언니의 병시중을 들었다. 오빠를 보낸 지 10년이 되는 올해 오빠를 보냈던 그 계절에 단풍숲을 지나 같은 곳에 안치가 되었다.


조카는 말했다. "이제야 아빠의 마음을 알 거 같아요. 나는 엄마만 돌보면 됐지만, 아빠는 나도 돌보고 집안일도 하고 돈도 벌어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지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한 칸에 유골을 모시고 싶지 않았는데 자리가 없어요" 그동안 간호를 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많이 하였기에 조카는 장례 내내 담담했었다. "10년 만에 합방을 하네요"하는 관계자의 말에 우린 그저 오빠가 이제는 덜 외롭겠네 하고 받아들였다. 어차피 산 사람의 감정이니까

그렇게 언니를 오빠와 같이 봉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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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는 외아들이었고 오빠도 외롭게 살았는데 조카도 형제가 없이 혼자다. 친척이 있지만 어디 내 형제만 하겠는가. 봉안을 마치고 도착지가 서로 달라서 각자 차를 이용하여 돌아가야만 했다. 조카와 질부. 질부 어머니. 4학년 아들. 이렇게 네 명이 커다란 운구차에 타는 걸 보는 데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왠지 더 허전하고 쓸쓸해 보였다.


이제는 아이도 낳지 않고 기껏해야 한 명 정도인 가정이 많다. 내 동생도 그렇다. 동생이 장례를 보다가 문득 말한다 "언니 나중에 내 아들도 저렇게 쓸쓸해 보이겠지" 우리 세대에는 그래도 사촌들이 많은데 아이들의 세대에는 그나마 형제가 없으니, 지금처럼 큰일에 달려와 줄 사람도 많지 않으리라. 그래도 끝까지 남아서 같이 있는 건 가족인데, 요즘의 가족구성원은 단출하게 바뀌고 있다고 생각하니 뭔가 허전하긴 하다.


새언니가 가시면서 한자리에 모이기도 힘든 친인척. 모두를 한자리로 불러 모았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사촌들과 친인척들이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먼 길을 달려와서 한자리에 모였다. 약속을 잡으려 하면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 만나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다. 한가족이 집안에 살면서도 밥 한 끼 다 같이 먹으려면 시간을 맞추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이렇게 한달음에 달려와준 분들에게 조카는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조카는 나와는 11살 차이고, 삼촌이 조카보다 어린 동생도 있었다. 어렸을 때도 웃겼는데 지금도 여전히 웃긴다. 조카와 같이 늙어가고 있다. 조카덕에 나는 젊은 할머니가 되었다.


우리의 구심점은 이모였다. 백발이 멋진 이모는 우리의 안식처처럼 무슨 일이 있으면 모두가 이모를 통하여 전달되고 알게 되었다. 서울에 오면서 누구나 한 번씩 이모의 보살핌을 받았기에 그 고마움을 기억하고 사촌들이 다 같이 이모를 잊지 않는다.

"아이고 어서 와라 이게 얼마만이고"

이모는 반갑게 손을 잡아준다. 같은 서울에 살고 있어도 동서남북으로 갈려서 살고 있는 외사촌들이나 우리는 서로 보기가 힘들다. 이렇게 일이 있어야 모인다. 이것마저도 안 오면 거의 볼 수가 없었다.

어른들이 오랜만에 이렇게 모인 조카들은 보는 기쁨에 들떠서 말씀하셨다

"이리 보니 얼마나 좋노. 3년에 한 번이라도 연락을 하여 보면 좋을 텐데. 아니 5년이라도"

"10년도 이렇게 모으기는 힘들지"


어렸을 때는 잘 어울려 놀았기에 친했는데, 이제는 각자 살기에 바빠서 얼굴을 몇 년에 한 번씩 보는 것이다.

개중에는 30년 만에 본 동생이 있었다. 어렸을 때 얼굴이 남아 있지만 무심히 지나치면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을 거 같았다. 사촌언니가 반가움에 한마디 한다.

"어메야 니 하준이 아니가. 아이고 너 어렸을 때 대통령 된다고 했는데 어디서 뭐 하고 살았노. 한 30년이 됐나 니 얼굴 몰라볼 뻔했다"

그동안 한국에 없었던 동생은 3개 국어에 능통하였고,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이모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고 외삼촌은 시골에서 올라와 힘이 들 텐데도 조카들 하나하나 챙겨주었다. 이제는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고 이모부는 우리가 누군지도 가물가물하게 알아보고 소리도 잘 못 듣지만, 이 순간만큼은 반가움에 얼굴에서 옛날의 젊은 모습이 보인다.

"야들아 니들은 하나도 안 변했다"

"아니야 늙었지 뭐. 늙었는데 희한하게 옛날 그대로다"

어렸을 때 그 모습이 그대로 보이고 살아왔던 날들이 어땠을지 알지 못하지만, 힘겨운 순간에도 순한 얼굴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나이 들어가는 사촌들이 있어 마음이 포근해졌다.


다음날 새언니의 유해를 안고 납골당에 모여 언니와 오빠의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작별을 하였다.

납골당에는 수많은 이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제는 돈이 없으면 죽어서도 이런 곳을 못 들어오는 세상이 되었다. 선산이 있어도 매장을 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묘지법/장사(葬事)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매장, 화장, 자연장(수목장. 잔디장), 봉안(납골당)이고, 임의 처리는 불가하고 정해진 장소에 모셔야 한다.

지자체, 국공립 봉안당은 이용료가 사설보다 훨씬 저렴하다고 하니까 비교하여 선택하고 거리 공간 제한이 있으므로 미리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장례식장 빈소 사용료가 지역이나 시설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 80~150만 원 정도이고, 관은 40~200만 원 그 외에도 이모저모 들어가는 게 많다. 납골당(공공)은 10~50만 원이라고 한다.

가장 저렴하게 이용하는 장례 비용이 변동 감안하면 300~500만 원으로 예상이 된다고 한다.


조카가 오빠와 새언니를 봉안 한 곳은 부부 합장으로 천만 원으로 영구를 선택하였다. 오빠는 미리 지불하였기에 새언니의 비용만 발생하여 사인하고 절차를 마쳤다.


납골당을 나오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돈이 없으면 죽어서도 누울 곳이 없겠구나! 살아서도 내 집 하나 장만하려고 기를 쓰고 살다가 갔는데, 죽어서도 어딘가에 안치되기 위하여 가격을 책정하고, 금액을 감당할 수 있는 곳에 모셔야 하는 세상이 되었구나!


노후 준비도 제대로 못한 베이비부머 세대로서 자식에게 부담을 주지 않게 하려면 장례비용도 마련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죽고 나면 산 사람이 알아서 하겠지만, 부모 마음은 자식이 덜 힘들기를 바라게 된다. 괜히 비싸게 하지 말고 저렴해도 괜찮으니 무리하지 말아라! 하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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