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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이루었 지니?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 이루어질 지니」를 보고

by 담담댄스


전작 「더 글로리」의 성공은 김은숙 작가의 신작 「다 이루어질 지니」에 대한 기대감을 더욱 부풀렸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명제는 「미스터 선샤인」 이후, 「더 킹: 영원의 군주」(이하 「더 킹」)이 나와 언뜻 증명된 것처럼 보이지만, 메타인지 확실히 하고 나온 김은숙 작가가 보란듯이 「더 글로리」로 반격했기에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13회에 이르는 시리즈물을 끝끝내 끝마친 나는 이 드라마를 끝까지 사수한 나 스스로를 제일 칭찬해 줘야 할 것 같다. 요즘 내가 많이 쓰는 표현이지만 핍진성에 신경 쓰느라 개연성을 놓쳤던, 조금만 더 신경 썼더라면 전작의 성공을 뛰어넘는 역작이 될 수 있었던 「다 이루어질 지니」에 대한 작품평을 쓰는 일. 무엇무엇이 좋았다고 쓰는 일에는 흔쾌히 나서면서도, 무엇무엇이 좋지 않았다 말하는 일에는 인색한 내게, 감상평을 쓰는 일만큼은 이 작품이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 아니 유산 아닐까.


스포일러가 있으니 작품 감상 전이라면 이 글을 읽지 않으셔도 좋다.






김은숙 작가의 재능이자 장기라고 한다면 우리나라에서 로맨틱 코미디에 가장 능하다는 점이다. 「별에서 온 그대」와 「눈물의 여왕」으로 스타작가 반열에 오른 박지은 작가도 있지만, 나더러 한 시대를 풍미하는 로맨틱 코미디 작품들을 열거하란다면 김은숙 작가의 작품이 우선할 것 같다.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는 아무래도 ‘코미디’보단 ‘로맨스’에 방점이 찍혀있다. 수많은 로맨스물이 있지만, 그 사랑을 더욱 애틋하게 자아내고, 과몰입을 불사할 만큼 주인공 커플에 대한 공감대를 높이는 일. 김은숙 작가는 그런 면에서 천재적이며 독보적이다.


이 부분 관련해 김은숙 작가가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바로 남녀 주인공의 직업/신분을 설정하는 일이었다. 지위상의 간극을 넓혀 애틋함의 기본 조건값을 높은 난이도로 설정해 버리는 식이다. 그래서 초기 흥행작을 보면 편해서 뻔한 '재벌남 - 가난녀'(「파리의 연인」, 「시크릿 가든」, 「상속자들」) 구도를 줄곧 가져갔다. 그리고 그런 설정에 시청자들이 식상해져 갈 때쯤, 김은숙 작가는 더욱 파격적인 관계를 선택했다.


직업군인 - 군의관(「태양의 후예」)은 그럴 수 있다 치자. 하다하다 도깨비 - 여고생(「도깨비」)이라든지, 군주 - 형사(「더 킹」)까지. 더 큰 자극이 필요했는지 이번엔 사탄과 사이코패스라는 설정에 이르고 말았다. 극단적으로 설정한 관곗값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보여주고자, 전쟁터는 물론이고 멀티버스, 역사 속 어느 시점, 내세와 현생 등 남주와 여주 사이에 시간과 차원의 장벽까지 배치하는 식으로 배경 세팅도 빡세게 가져갔다. 설정을 이런 식으로 해버리면 주인공은 지 혼자 먹고살기 빠듯한 상황에 처하지만, 역설적으로 더욱 애틋해지는 러브라인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기도 하다.


애틋한 러브라인 형성을 위해 새로운 세계관까지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작가는 이 작품을 성공시키기 위해 일종의 책임감을 짊어져야 한다. 그 책임감은 바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얘기했던 핍진성(세계관)을 치밀하게 잡아나가야 하는 것이다. 김은숙 작가의 전작에서 그것이 가장 잘 된 작품은 「도깨비」이고, 가장 실패한 작품은 「더 킹」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번 신작 「다 이루어질 지니」는 흥행은 몰라도 「더 킹」보다 이런 면에서 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평행우주의 몇 가지 법칙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던 「더 킹」보다도, 이번 작 「다 이루어질 지니」는 사탄(a.k.a. 지니, 김우빈 扮)과 사이코패스(기가영, 수지 扮)를 둘러싼 두 가지 세계관을 모두 설명하고 납득시켜야 하기에 더욱 난이도가 높았다. (솔직히 이 글을 쓰기 위해 나는 나무위키를 탐독했고, 이제서야 아주 조금 알 것 같다.)


디테일하게는 불가능하고, 최대한 단순히 설명해 보겠다. 남자주인공은 인간이 아닌 정령이며, 여자주인공은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이코패스 인간이다. 심지어 여주는 남주가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을 기다린 복수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둘의 사랑을 이어 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배경과 서사, 주변인물들이 할애돼야 하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겠는가.


물론 전작이었던 「더 글로리」 역시, 주인공을 둘러싼 방대한 주변인물들이 등장했지만, 판타지 로맨스가 아닌, 보다 현실세계에 근간을 둔 복수극이라는 장르로 설정한 덕에 모든 인물의 개별 서사는 촘촘하게 엮인 씨줄과 날줄로써 기능했다. 그리고 결과물은 탁월하게 짜인 한 장의 러그(Rug)처럼, 완벽을 논할 만큼 아름다웠다.


「다 이루어질 지니」와 세계관(타임슬립/윤회사상)이나 캐릭터(정령/인간) 설정이 가장 흡사한 「도깨비」는 어떠한가. 「도깨비」는 21세기 대한민국과 고려라는 익숙한 배경을 설정했고, 등장인물들 역시 도깨비, 저승사자, 삼신할매 등 명료한 상징과 간단한 설명만으로도 역할을 이해하기 쉽도록 캐릭터를 구축했다. 모든 갈등이자 파국의 원인은 단 하나의 역사적 사건(충신을 두려워한 왕의 폭주와 간신배의 모략질)으로 설명되며 복수의 대상과 러브라인의 개연성, 비극적 장치 또한 뚜렷하다. 이렇듯 작품 배경과 전개에 대한 높은 이해도가 마련되면 시청자들은 더욱 몰입해서 드라마를 볼 수 있게 된다.


「다 이루어질 지니」의 세계관을 이해하려면? 성서(창조론, 이에 따른 신/천사/정령/인간 등의 상징과 함의)와 고대 아라비아의 전설, 고려와 몽고, 아라비아를 연결하는 실크로드에 대한 역사적 지식, 여기에 사이코패스의 특성과 함께 첨단의 문화와 트렌드(유튜브 인플루언서, 동성애 코드 등)까지. 방대한 시대적, 문화적 진폭을 감당해야 비로소 서사를 받아들일 준비가 끝난다.


이제 본격적으로 캐릭터와 서사에 대해 살펴보자. 사전작업에 이리도 공을 들였다면 캐릭터 역시 허투루 만들지는 않았을 터. 주연뿐만 아니라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캐릭터 자체로는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각각의 에피소드가 그 매력을 제대로 어필해 주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이전에도 역설한 바 있지만, 시청자를 오래 잡아두려면 서사가 복잡할수록 캐릭터는 단순해져야 하고(대다수의 막장드라마), 캐릭터가 복잡할수록 서사는 단순해져야 한다(「더 글로리」).


이 드라마 서사의 가장 큰 줄기는 이렇다. 지니는 전생에서 자신을 램프 속에 983년이나 가둔 주인(기가영)을 현생에서 만나 세 가지 소원을 빌게 하고, 그 탐욕적인 소원으로 인해 자신의 주인이 인간성을 잃고 타락하게 만들어야 한다. 만약 주인이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을 위한 소원을 빌어 인간성의 고결함을 증명한다면 인간을 우습게 본 오만한 지니는 인간에게 머리를 숙여야 하고 천사에게 목이 잘려 죽게 된다. (이것만으로도 너무 복잡하지 않음요?)


여기에 지니는 기가영을 애초에 복수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고, 기가영은 태어나보니 사이코패스라 사랑이라는 감정이 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데다 지니의 존재 그리고 소원에 관련된 룰, 지니를 둘러싼 역사적 사건과 관련자들을 파악하지 못하고서는 디즈니 만화에서만 봐온 작금의 생뚱맞은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다. 복잡한 서사와 복잡한 캐릭터의 결합인 것이다. 자, 당연히 지니는 김우빈이고 램프의 주인은 수지이니, 김은숙 작가(+보조 작가)는 이 둘을 사랑에 빠뜨려야만 한다.


여기에 '램프의 지니' 상징과도 같은 기가영의 세 가지 소원이 메인 스토리로서 극 전체를 이끌어간다. 그런데 이 소원 안에 다시금 다양한 등장인물(4명의 인간과 1마리의 개)이 등장하고, 저마다의 세 가지 소원이 추가로 기가영의 소원에 엮여들어 온다. (여주의 3가지 소원 + 다섯 명의 3가지 소원 = 18가지 소원, 정말 18같네... 아! 전생에서도 세 가지 소원을 빌었으니 21개네;;;) 여기에 작가 김은숙의 본질이자 정체성, '로맨스'까지 넣어야 한다. 결국 이 로맨스를 연결하는 에피소드나 이야기 전개가 이토록 복잡한 서사 안에서 설득력을 갖기 어려워진다.


이를테면 지니와 기가영 사이의 설렘이 충분히 무르익을 만한 에피소드나 감정선 없이 갑작스레 키스신이 등장한다든지, 정작 키스해야 할 상황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룰을 지키려고 편의점에 맥주를 사러 간다든지. 도무지 이 둘이 어떻게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건지, 납득할 수 없는 상황들이 펼쳐진다.


더욱 애석한 것은 주인공의 서사를 받쳐주는 수많은 등장인물들마저 스토리에 개연성을 주지 못하고, 소비돼 버린다는 사실. 마치 1등급 한우로 제육볶음을 만든 느낌이랄까.


가령 사이코패스였던 자신을 일평생 지극정성으로 가르쳐, 얼추 사람 구실하게 만든 할머니(오판금, 김미경 扮)에게, 기가영은 소원 하나를 써서 자신과 같은 나이로 만들어 놓는다. 하지만 '회춘한 할머니'라는 캐릭터와 이 역할을 맡은, 연기력으로는 또래 중 단연 압권인 안은진의 역량을 제대로 써먹지 못한다. 회춘한 할머니를 고작 기가영의 유일한 친구, 최민지(이주영 扮)의 짝사랑 상대로만 기능하도록 했으니 말이다. 이 최민지라는 캐릭터 역시 레즈비언으로 설정한 이유, 그녀가 레즈비언이라는 점이 이 작품의 주제나 전개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런 장치는 그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다.


심지어 우리들의 청춘스타였던 다니엘 헤니에게는 개같은 역할(빌런, 발연기 그런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정말 개를 흉내 낸 연기다;;;)을 맡겨 희극적으로 소모시켜 버리고 만다. 이밖에도 '김은숙'이라는 이름값만 보고 출연을 결정한 많은 배우들이 연기력을 이렇게 낭비해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이 못내 안타까웠다.


이게 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게 아니라, 개가 전봇대 냄새를 맡는 거예요;;; (사진 출처_넷플릭스)


극단적인 감정선을 오가며 자연스레 이어가야 하는 주인공 김우빈과 수지의 연기는 탓할 구석이 전혀 없다. 오히려 기대보다 훌륭한 연기를 해주었다. 특히 사이코패스와 코믹 연기를 능수능란하게 펼쳐내야 했던, 그렇게 시청자를 설득시켜야 했던 수지의 감정연기가 초반엔 다소 어색해 보였지만, 시리즈 막바지에 감정을 터뜨리는 씬을 보고 나니 왜 그렇게 연기할 수밖에 없었는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능글맞음과 애틋함, 극한의 분노를 모두 자연스럽게 소화한 김우빈은 「도깨비」에서의 공유처럼, 또래의 주연급 남자 배우 중 비주얼도 연기력도 단연 탑(Top)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이 작품에서 굳이 좋았던 점 하나를 꼽자면 기가영의 마지막 소원, 바로 '사이코패스인 자신에게 단 하루만이라도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느끼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세 번째 소원은 다행스럽게도 작가가 벌여놓은 방대한 서사를 깔끔하진 못해도 원만하게 정리할 수 있도록, 그나마 합리적이고 납득할 만한 결말에 이르도록 이끌어 준다.


기가영은 이타적인 소원을 빌면 자신이 사랑하는 지니가 죽기 때문에, 많은 인간들에게는 소원 축에도 못 낄 '희로애락'이라는 감정을, 그것도 단 하루만 느낄 수 있도록 해달라는 소극적으로 이기적인 소원을 빌었다. 결국 세 가지 소원을 빌면 지니도, 소원의 내용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룰(이런 룰도 있었답니다;;)대로 지니에 대한 기억을 잃고, 오롯이 인간으로서의 감정만 남기게 된다. 하지만 기가영의 이런 이기적 소원의 바탕에는 '지니가 죽지 않았으면' 하는 이타적인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지니는 결국, 기가영 앞에 고개를 숙이며 인간을 경배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택한다.


소원이 이루어지자 갑자기 밀려드는 감정의 파고는 며칠 전 자신을 대신해 죽은 할머니에 대한 슬픔의 모습으로 들이친다.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도 슬픔이 뭔지 몰라 울지 못했던 기가영이 비로소 야수처럼 울음을 터뜨리는 그 장면이야말로 이 드라마의 클라이맥스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본의 아니게 지니와 기가영을 방해했던 천사 이즈라엘(노상현 扮)의 비서, 이렘(우현진 扮)이 (얘네들까지 설명하면 날샙니다......) 미안한 마음에 지니에 대한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주면서, 기가영은 자신으로 인해 지니가 죽었다는 사실까지 알게돼 더욱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리고 기가영은 사이코패스라면서 그렇게 하루 종일 울다가 죽는다. ('쟤 저렇게 울다 죽겠네'가 아니라 정말 울다 죽는다;;;)


그렇게 남주와 여주는 둘 다 죽음을 맞이한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남주와 여주 모두 죽음으로 끝난 드라마는 「미안하다 사랑한다」랑 「발리에서 생긴 일」 뿐인데...... 그 두 드라마를 거론하는 것조차 미안한 마음이 든다. 13회를 감상한 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나무위키와 수많은 해석 콘텐츠를 보니


정말 조금만 덜어내고 집중했더라면 역대급 명작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싶은 아쉬움도 남더라. 「더 킹」처럼 설정오류에 따른 옥에 티는 없었던 것 같으니. 하지만 일은 이렇게 벌어지고 말았다.






남주와 여주의 죽음이 드라마의 결말은 아니지만, 굳이 이후의 이야기를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름의 해피엔딩이다) 혹시 오늘 내 글이 별로였다면, 그건 결코 내 탓은 아닐 거다. ㅋㅋㅋㅋ


이상 비평보다는 투정에 가까웠던 감상기,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 이루어질 지니」였습니다. (머쓱하니깐 <출발! 비디오 여행>식 마무으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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