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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팬인 내가 이런 구단을 응원해도 될까

by 담담댄스

매거진북 <그깟 공놀이>는 가성비 극악인 콘텐츠다. 스포츠를 다룬 에세이는 개요를 짜는 데도, 자료를 찾는 데도, 의미와 통찰을 뽑아내는 과정에서도 여타 에세이에 비해 시간이 좀 더 걸린다. 못해도 4~5시간에 걸쳐 초안이 나오고, 그 초안을 보강하고 다듬는 데 드는 시간까지 하면 6~7시간은 후딱 지나가 버린다.


이렇게 고생 끝에 공개된 글의 반응은 미적지근하다. 많이 봐달라 징징대는 건 결코 아니다. 브런치에 스포츠 팬자체가 많지 않은 데다 나 역시 전문가라 할 수 없으니 반향이 적다. 이와 같은 이유로 다른 결의 콘텐츠에 비해 조회수 등 트래픽이 전반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다고 담담하게, 당연한 결과라 얘기하는 중이다.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안 쓰면 그만이다.


사실 스포츠의 생리는 참 단순하다. '누군가 이기고 누군가는 진다', 이게 끝이다. 기록은 승리와 패배, 스코어만 남고 승리에 기여한 이들, 패배의 원흉이 된 이들의 서사는 잠시 소비되면 그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깟 공놀이>를 쓰는 걸 멈출 수 없는 것은 스포츠를 바라보는 저마다의 다른 기억 때문이다. 같은 장면을 봐도 기억은 다르게 적힌다. 승자라고 영원히 기억되는 것은 아니며, 패자 역시 영원히 루저로 남지 않는다. 슈퍼스타의 클러치샷이 기억에 남기도하고, 때로는 언더독이나 무명 선수의 역전샷 한 방이 생생하게 떠오를 때도 있는 법. 이렇게 공놀이와 얽힌 나만의 이야기들이 켜켜이 쌓이면 강력한 유대관계를 만드는 경우가 종종 생겨난다.


스포츠란 원래 이토록 합리와 효율에서 먼 이야기다.






어린 시절, 외삼촌과 함께 찾았던 잠실 야구장에서 어떤 선수를 처음 목격했다. 안타를 치고 나가 가볍게 2루와 3루를 훔쳐 쉽게 선취점을 올리는 플레이어. 도저히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타구를 건져내 역동작임에도 불구하고 강한 어깨로 1루에 던져 아웃시키는 플레이어. 경기가 잘 안 풀리면 직접 홈런을 때려 분위기를 일순간 뒤바꾼 플레이어. 아무런 이유 없이, 나는 이 선수 덕분에 타이거즈라는 구단의 팬이 되었다.


구단의 주인은 '해태'라는 기업이었다. 홈런볼과 맛동산, 허니버터칩을 모르는 이는 없으리라. 과자를 팔아서 운영하는 프로야구단. 우승 보너스를 과자선물세트로 주었다는 유머가 진짜라고 해도 믿을 법한, 궁핍한 모기업 아래서, 타이거즈는 프로야구 출범 당시 많은 아픔을 지닌, 소외받는 도시였던 광주를 연고로 창단했다.


비내리는 호남선 남행열차에 흔들리는 차창 너머로
빗물이 흐르고 내눈물도 흐르고 잃어버린 첫사랑도 흐르네


이렇게나 슬픈 가사를 흥겨운 가락에 싣고, <남행열차>를 부르며 울분을 열정으로 토해낸 팬들에게 타이거즈는 자부심 그 자체였다. 나는 마흔이 넘어서도 친구들에게 '국내 프로야구 최다 우승팀'의 팬이라 유치한 자랑을 일삼기도 한다. 이토록 찬란한 성과를 뒤로하고, 궁핍과 결핍이 만난 타이거즈는 IMF 위기를 맞아 끝끝내 모기업의 부도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피해 가지 못한다.


이후 몇 년 간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라는 유행어처럼 선수를 팔아 구단자금을 마련하는 셀링구단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지만, 마침내 구세주를 만난다. 2001년, 탄탄한 자금력을 갖춘 기아자동차를 새 구단주로 맞이한 것이다.


1980~1990년대만큼은 아니었지만, 기아 타이거즈는 SSG 랜더스(前 SK 와이번스)와 더불어 2000년대와 2010년대, 2020년대 모두 우승을 경험한 강팀으로서 재기에 성공했다. 성적이 중요하지만, 내가 타이거즈를 사랑하는 이유는 단순히 거기에만 있지 않다. 선동열 → 이종범 → 윤석민 → 양현종 → 김도영으로 이어지는 프랜차이즈 슈퍼스타들이 결정적인 순간마다 영웅처럼 팀을 구해냈고, 팀 성적이 좋지 않을 때에도 팀을 지켜준 파수꾼이 있어 든든했다.


특히 최형우가 그랬다.


2024년 통합우승의 영광을 뒤로한 채, 올 시즌 기아 타이거즈는 개막전부터 슈퍼스타 김도영의 햄스트링 부상을 시작으로 주전급 3~4명이 한꺼번에 부상으로 라인업에서 빠지면서 2군 유망주들로 팀을 꾸려가야 했다. '극강을 넘어 특강'이라며 설레발치던 전문가들의 의견이 머쓱하게, 팀 성적도 자연스레 고꾸라질 수밖에 없었다.


패배가 익숙해지던 그즈음, 결정적인 한 방으로 팀을 승리로 이끈 40대의 노장 최형우는 이런 인터뷰를 했다.



(주전들이) '다 낫고 올라오면 또 밀려나겠지' 이런 생각 말고
자기가 여기서 잘해서 누가 와도 밀어내면 돼요 그냥


정말 놀랍게도 이 인터뷰를 기점으로 소위 '함평(2군 소재지) 타이거즈'라 불리는 유망주들이 힘을 내며, 타이거즈는 전반기 막판 2위까지 치고 올라간 적도 있었다.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지만, 위대한 팀으로 이끄는 선수는 분명히 존재한다. 내게 타이거즈의 최형우는 2017년과 2024년, 두 번의 우승을 이끈 슈퍼스타였으며 자신의 사비를 털어 유망주 후배들과 따뜻한 나라로 동계 전지훈련을 떠나는 멋진 선배였다. 코칭스태프에게는 모두들 부상으로 쉬어갈 때도, 별다른 생색 없이 라인업을 지키던 믿을만한 고참이었고, 꼰대처럼 말로만 군기를 잡는 것이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는 덕아웃의 리더였다.


그런 그가 야구를 오랫동안 너무나도 잘해 세 번째 FA 시즌을 맞았고, 현재는 타이거즈와의 결별이 유력한 상황에 처해 있다.






10개밖에 없는 프로야구 구단 중, 메인타이틀 스폰서를 바꿔가며 자생모델을 찾는 히어로즈를 제외한 9개 구단은 모두 모기업의 자금줄에 의존해 구단을 운영하고 있다. 대기업이 프로스포츠구단을 운영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가 '새로운 수익모델 창출'은 절대 아닐 것이다.


기아 타이거즈만 봐도 1년 운영비(아래 표에서 '구단 운영원가' 참고)가 600억 원이 넘으며, 이는 입장 수익과 굿즈 판매로 도저히 메울 수 없는 수준이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프로구단 운영은 대기업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사회공헌사업(CSR)에 다름 아니다. 잘 쳐줘야 프로구단을 운영하는 네임드 대기업이라는 자존심 유지비용?!


2024년 기아타이거즈 감사보고서 중 손익계산서 발췌


영업이익 기준으로 7억 원이 넘는 적자. 그나마 인기구단에 속하는 기아 타이거즈가 이 정도이니, 국내 프로스포츠에서 모기업에 의존하지 않고 자생적으로 돈을 버는 프로스포츠 구단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쓰는 구단들이 있다. 모기업의 회계 담당임원들은 다들 뜯어말리겠지만, '우승' 내지는 '강팀'이 되기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는 구단이 있다. 이번 스토브리그를 보면 두산이 그렇다. 두산은 기아의 주전 유격수 박찬호 영입에 무려 80억 원을 투자했으며, 이 밖에도 내부 FA 3명과 재계약을 완료해 총 186억 원을 스쿼드 강화에만 쏟았다.


2025년 3분기 두산그룹 재무상태표(왼쪽)와 손익계산서(오른쪽)


물론 두산도 대기업이다. (그 돈을 야구단에 쓰는 건 아니지만) 보유하고 있는 현금이 올 3분기 기준 무려 4.3조 원이고, 영업이익은 무려 7875억 원에 이른다. 그런데 영업이익을 작년과 비교해 보자. 큰 폭은 아니지만 확실히 줄어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돈 한 푼 못 벌어다 주는 일개 프로야구단에 186억 원을 선수영입 비용으로만 투자하는 결정이 결코 쉽다고만은 말할 수 없다.



위 자료는 기아의 올 3분기 자산상태와 손익현황이다. 유동성(현금+단기금융상품+기타유동금융자산)은 20조 원이 넘고, 영업이익은 무려 7조 원이 넘는다. 두산과 비교하면 월등한 수준이다. 최소한 여력만 따져본다면 기아 타이거즈가 돈이 없어서 선수를 잡지 못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물론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무려 2.7조 원 넘게 영업이익이 감소한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뉴스에서 봤던 '관세'의 영향이 매출원가를 타고 들어간 영향일 것이다. 아마 구단에서는 올 스토브리그와 FA 협상의 기조를 '합리적인 관점을 유지하며, 오버페이는 없다'고 언론플레이를 할 테고, 모기업의 사정이 좋지 않다는 얘기를 기자들에게도 비보도 전제로 흘렸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모기업 모냥빠질 테니 대놓고는 못하겠지)


그러나 40년이 넘는 프로야구 역사와 함께한 팬들에게는 숫자로만 얘기할 수 없는 서사가 있다. 누군가는


네 돈 아니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할 순 있어도, 팀을 오랫동안 사랑해 온 팬들에게는 절대로 건드릴 수 없는 불가침 영역의 선수들이 있다. 적어도 구단이 해체나 매각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면, 이 낭만적인 이야기를 이어가야 할 의무가 있다. 이를테면 구단이 잘 나갈 때는 물론이고, 수렁에 빠졌을 때도 외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 슈퍼스타를 지키는 일. 이런 구단을 보고 미래의 슈퍼스타들이 구단과 팬에 대한 애정을 키워나가는 일. 나는 이것을 헤리티지(Heritage)라 부르고 싶다.


이 헤리티지는 그 어떤 종목도 갖기 힘든, 프로야구에게만 허락된 특권이다. 이 헤리티지가 있어야 비로소 '명문구단'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재무제표까지 들먹이며 이런 글을 썼을까 이해해 주기 바란다. 진심 답답해서 그랬다. 사실 돈을 쓰고 말고는 구단의 자유의지이며, 그깟 공놀이는 절대로 밥먹여주지 않는다. 아마 최형우가 이적하더라도 내가 팀 세탁을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꼴찌를 도맡아 하던 암흑기 때도 팀 세탁만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당장 내년이면, 푸른 옷을 입고 타이거즈 마운드를 상대하는 최형우를 지켜봐야만 한다. 그는 아마 나이를 잊은 활약으로 1인분 이상의 역할을 해낼 것이며, 설령 그렇지 못하더라도 덕아웃에서 삼성 라이온즈의 젊은 유망주들에게 자신의 노하우와 멘탈리티를 아낌없이 전수해 줄 것이다. 이미 그가 타이거즈에서 해준 것이 너무나 크기에, 그에게 역전 적시타를 맞는다고 해도 기꺼이 박수를 보내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최형우보다 어쩌면 더욱 상징성이 큰 선수와의 FA 협상이 남아있다. 나는 아직도 2017년 한국시리즈 2차전, 1:0이라는 절체절명의 스코어에서 정면승부를 피하지 않았던, 그리고 122구 완봉승으로 시리즈 분위기를 되찾아온 양현종이라는 대투수의 투혼을 잊지 못한다.




이런 이야기에 대관절 관심이야 있겠냐만은, 그래도 누군가 K5와 소나타를 고민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K5를 선택하는 이유가 양현종이 영구결번을 받고 은퇴하는 타이거즈가 될지도 모르니까. 부디 이런 말도 안되는 간절함을 외면하지는 말아줬으면 한다. 헤리티지를 지닌 명문구단을 지향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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