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자신감의 의미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나는 작은 일 하나 맡는 것조차 두려웠고, 버거웠다. 간단해 보이는 일조차 미리 얘기해둬야 하는 사람들은 왜 이리 많은 것이며, 메일, 협조전, 품의서 등등 작성해야 할 문서는 또 왜 이리 많은지. 모든 일에 겁이 났다.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이번엔 루틴하게 하는 일만 하고 싶어졌다. 지난주에, 지난달에 써두었던 문서에서 날짜만 바꿔서 올리면 되는 일, 손에 익어 키보드와 마우스 몇 번 기계적으로 움직이면 되는 일. 그런 일들만 하고 싶어졌다. 위에서 성장할 기회를 준다며 기획성 업무들을 맡기면 겉으로는 "해보겠습니다!" 했지만
이걸 어떻게 사원 혼자 하라는 거지? 사수가 필요한 일인데
불만인지, 짜증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생각에 사로잡혔다. 결국 납기까지 전전긍긍하다 겨우 마무리했던 기억이 난다.
회사생활 10년이 넘으니, 저런 생각의 주인공에서 조연으로 역할을 바꿀 수밖에 없게 됐다. 후배들은 가끔 내가 한 말과 똑같은 고민을 털어놓는다.
이걸 어떻게 하죠?
공감 못하는 바는 아니다. 분명 까다로운 기획이고, 절차적으로도 복잡해 보인다. 여유 있게 두세 명의 인력이 한 달은 붙잡고 해야 숨 쉴 구멍이 있어 보이는데 사원~대리 한 명에게 일이 떨어졌다, 그것도 당장 이번 주까지 마무리해야 하는. 일을 도와주면 좋겠지만, 내 코가 석자일 때는 그저 안타까울 뿐. 해줄 수 있는 말이라곤 이것뿐이다.
지금부터 일주일 후를 떠올려봐.
그러면 신기하게도 어떻게든 일이 마무리 돼 있다.
물론 아무에게나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그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어떻게든 붙잡고 있는, 절실한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신상품 출시를 앞둔 때였다. 일반 상품이나 서비스 신상품과는 달리 금융 신상품은 규제사항까지 론칭 시에 꼼꼼히 챙겨야 할 것이 많았다. 출시 한 달을 앞두고, 함께 준비하던 동료들은 팀을 옮기거나 퇴사를 앞두게 됐다. 가장 많은 인력이 가장 집중해서 일해야 할 시기에, 가장 적은 인력만 남게 된 것이다.
처음엔 그저 막막하다가 먹먹해졌다. 내 마음보다 더욱 내 마음 같은 동료이자 선배, 딱 한 분만이 옆에 있어주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심리적으로 무너질 뻔한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나는 좀 희한한 것 같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어버린 것이다.
생각해 보니 한 달이면 너무나 충분한 시간 아니야?
그동안 네가 했던 일 중에 한 달이나 주어진 일이 있었어?
나의 생뚱맞은 긍정과 낙천 회로는 절망적 상황에서 왠지 모를 기대감과 설렘을 가져다준다. 한 달을 충분한 기간이라고 생각하니 될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이다.
그 이후로 한 달, 주어진 24시간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마음으로 살았다. 신상품 출시에 필요한 일을 계약 / 마케팅 / 상품 이라는 대분류로 묶고, 각 분류마다 세밀하게 To do List를 기반으로 WBS(Work Based Schedule)을 만들어 그날 해야 할 일을 끝내지 않으면 퇴근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한 달을 일했다. 부득이하게 카운터파트에 따라 일의 결과나 의사가 결정되는 일을 제외하고는 실행해 나갔다.
그래도 힘에 부칠 때는 상품 론칭 다음 날을 상상했다. 무사히 출시한 후, 약간의 여유와 바쁨이 공존한 채 동료와 커피나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 그때를 생각하니 버틸만했다. 기저에는 분명히 '상품은 무사히 출시될 것'이라는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그 자신감은 일종의 주문과도 같았다. '그렇게 될 것'은 확신이자 예언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수를 써서도 내가 그렇게 되도록 만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과는? 당연하게도 무사히 상품을 론칭했다. 몇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나를 믿어준 동료의 도움으로 해낼 수 있었다. 상품 론칭 전날에는 같은 상품을 준비하는 옆 팀에게 노하우를 전수하며 파이팅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여유까지 생겼다. 물론 옆 팀 역시 무사히 상품을 론칭했다.
일은 언제나 내 한계를 시험하며 끊임없는 경신과 갱생을 요구한다. 물론 그 요구에 부응해 줄 마음은 각자에 달렸지만, 대체로 우리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스스로를 경신하고 갱생해 왔다. 일을 해내는 것은 대단한 사람들만의 몫이 아니다. 때로는 마감에 휩쓸려, 때로는 어찌어찌 관성적으로 하다가 성사시킬 때도 있다.
이 모든 일의 완결과 성공이 절대 요행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작은 성취부터 켜켜이 쌓아온 '경력'(a.k.a. 짬)이라는 것이 발휘되는 시점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단 한 가지다. 어떻게든 이뤄내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것뿐이다. 그래도 버거울 때는 납기 다음 날을 떠올려 보자. 분명히 일은 어떻게든 되어 있을 것이고, 오랜만에 동료들과 커피라도 한 잔 나눌 여유가 생겨있지 않을까.
이것이 나를 믿는 마음, 자신감(自信感)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