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유불급
회사를 오래 다니면서 점점 이해되는 일도 많아지지만, 반대로 이해불가한 일들도 늘어나고 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은 이렇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or 이게 이렇게까지 할 일이야?
내가 생각해 온 회사생활, 그리고 일의 원칙은 아래처럼 심플하다.
팀과 나의 R&R에 알맞게 주어진 일을 한다
설령 R&R에 어긋나더라도 회사에 도움 되는 일이나 내 커리어에 도움 되는 일이면 한다
그런데 연차가 쌓일수록 이 두 가지 원칙에서 벗어나는 몇 가지 일들이 잦아지고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적으로 절규한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고!!! 이런 일들도 회사생활을 좀 더 하다 보면 이해할 수 있게 되려나. 이런 일을 이해할 수 있게 될 내가 두렵기까지 하다.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이 우리의 리얼 월드를 위협하고 있는 대혼돈의 21세기에도 직접 프린트한 문서에 담당자와 부서장들의 사인을 받으러 돌아다녀야 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돈이 없어서 그러는 거겠지라고 생각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돈을 아껴야 돼서 그러는 거겠지라고 생각한다면 예산이 줄줄 새는 사업과 비용들을 열 개도 넘게 댈 수 있다.
어떤 부서 담당자는 본업이 하루 종일 도장만 찍어주는 일이다. 그분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은 전자결재로 처리하고 그분에게 더욱 맞는 일, 회사의 생산성을 높이는 일에 투입하는 것이 모두에게 좋은 방향이 아닐까 싶은 마음이다. (중요한 서류이기에 사람이 직접 꼼꼼하게 검토하고 진행해야 해서 그렇다고 한다면 더 할 말은 없다)
보통 임원급에서 많이 일어나는 일이다. 첫 번째는 의전이다. 신입사원 시절 '모르면 모른다고 해라' 이후로 들었던 말 중에 사실검증이 끝난 말이 바로
의전 싫어하는 사람 없다
였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위한 의전은 그만큼 아낀 시간과 에너지를 중요한 의사결정하는 데 쓰거나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하라는 뜻에서 제공되는 암묵적 합의 내지는 서비스일 것이다. 회사에서는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맡기기 위해 비서를 채용한다.
물론 나는 비서일을 해보지 못했기에 비서에게 허용되는 의전의 선이 어디까지인지는 알지 못한다. 은행 업무나 간단한 심부름 등 어느 정도 개인적인 업무까지 통상적으로 비서들에게 부탁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이 표준이라면 그 자리에 가보지 못한 나로서는 그런가 보다 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비서가 아닌 사람에게도 지극히 사적인 일을 부탁하는 경우다. 직원들에게 개인 컵을 씻어오게 한다든지, 출퇴근 방향이 같거나 비슷하다는 이유로 본인의 차를 운전하게 시키는 등의 일은 내 생각엔 선을 넘었다.(내가 듣거나 겪은 일만 얘기하는 것이다) 더욱 문제는 이런 일을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하거나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부하직원들이 있다는 데 있다.
가오의 상징 같은 의전 말고도, 가오잡기에 대한 다른 에피소드도 있다. 바로 본인의 영향력을 부하직원을 통해 입증하려고 하는 케이스다.
이사나 상무 같이 임원이 되면, 비슷한 직급이나 직책의 사람들 간에 보이지 않는 알력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럴 경우, 두 가지 상황에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우선 어느 본부나 부문에서 담당하기 애매한 일들을 일단 가져오고 보는 식이다. 놀고먹는 부서야 그런 상황을 크게 반기거나 개의치 않아 하겠지만, 그런 부서가 전 세계에 존재할지 의문이다. 굳이 존재감 좀 보여주겠다고 우리 부문에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가져와서 일이 차고 넘치는 실무자에게 넘겨주는 경우를 자주 봤다.
두 번째는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한 어젠다로 만들어서 쓸데없이 리소스를 뽑아먹는 경우다. 예를 들면 영업부서는 월초마다 마감업무로 정신이 없을 텐데, 대표의 별다른 요청도 없었음에도 갑자기 본부장이나 부서장이 영업 선진화 전략을 대표에게 보고하기 위해 보고서 작업을 지시한다든지, 기강이 해이해졌다며 갑작스러운 단합대회를 준비하는 것 같은 일이다. 그것이 그 시점에 적확하게 필요한 일이라면 아무리 바쁘더라도 해야 하는 게 맞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통 이런 영역을 '정무적 감각'이라고 좋게 포장하지만 그 일의 결과로 본부 전체의 평가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거나 티가 날만한 상황이 아니라면 제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번에 옆 본부가 이런 걸 해서 대표의 칭찬을 받았다는데 우리는 더 잘해야 하지 않을까라든지, 내가 쟤보다 낫다는 걸 보여주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투영되는 상황에서, 결국 쌔가 빠지는 건 팀장과 실무자들일 것이다.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들 역시 나름의 롤모델이 있을 것이다. 스티브 잡스, 마크 저커버그, 제프 베조스, 일론 머스크. 소위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사람들에 대한 일화나 그들이 일하는 원칙을 담은 책들은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이들에 대한 경외심이 커져, 자기도 모르는 새 단순히 특정 롤모델을 그저 복붙하기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문제다.
그런 구루(Guru)들이 예의주시하는 어젠다 역시 놓칠 수 없다. 예를 들면 일론 머스크가 트위터에 한 줄로 "대세는 NFT"라고 하면 너도나도 NFT 얘기를 하는 식이다. (정말 이런 쪽 1도 모르지만) 블록체인에서 비롯한 비트코인을 위시해 온갖 암호화폐가 전 세계를 휩쓸더니, 이젠 콘텐츠까지 가상자산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당시 내가 일하는 회사는 사업자등록증 상 허용된 업종 내에서 NFT 관련 사업을 영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오너는 밀어붙였다. 우리야말로 NFT 시장에 빨리 발을 들여서 선점해야 하지 않겠냐고 임원들을 닦달했다. 과업이 떨어지자, 많은 부서장들은 자신의 업무영역에 티끌이나마 연결시킬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에서 어떻게든 엮어서 NFT 사업 기획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못하면 하고 있는 회사랑 일단 제휴 미팅이라도 하고 보자는 식이었다.
그 기획안의 일부를 만들면서 나는 임성한, 김순옥, 김은숙 같은 유명 드라마 작가들을 떠올렸다. 이 정도면 그들보다 못할 것이 없어 보였다. 드라마 작가들은 대중들의 인기를 얻고 돈이라도 크게 벌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해피엔딩으로 그럴듯하게 써 내려가는 일을 하면서 든 자괴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후문으로, 기획안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했다. 역시 예상대로 그런 기획안이 실현될 리도 없었다.
이런 일들을 이해 못 하고 답답해하는 것을 보면 내가 회사생활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먹고사니즘은 평생 나를 스토킹하겠지.
뉘예뉘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일 저일 다하면서 다니다가 쓸쓸히 회사를 나가게 된들, 누가 나를 비난하고 책망하랴. 아부를 떠는 사람을 욕할 필요 없다. 그렇게 잘 나가기 쉬운 방법이 있다면 왜 다들 안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아부도 '잘' 해야 한다. 아부만 떤다고 다 잘 나갈리는 만무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