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흰쌀밥이 있다면, 프랑스에는 바게뜨가 있다
첫째가 아직 두 살일 때, 아이가 다니던 크레쉬에서 충격을 받았던 일화가 있다.
아직 학기 초 적응기간 중이라 오후 구떼(간식) 시간에 함께 한 날이었다.
선생님은 제철과일을 툭툭 잘라 큰 그릇에 담은 후, 아이들이 각자 원하는 만큼 집어가게 하셨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그다음부터가 조금 이상했다.
갑자기 어디선가 튀어나온 바게뜨를 북북 찢어 여러 동강을 내셨다.
'식사시간이 아닌데 왜 바게뜨가 나오지?' 궁금함도 잠시, 이번에는 초콜릿이 등장했다.
초콜릿을 또각또각 조각낸 후 바게뜨 하나마다 쏙쏙 끼워 아이들에게 돌리시는 게 아닌가?
아직 이유식도 시작 안 한 아기가 잇몸이 간지러워 울 때 '키뇽'(quignon)이라고 부르는 바게뜨 끝부분을 잘라 빨아 물게 하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지만, 두 살도 안된 아이들에게 초콜릿 끼운 바게뜨라니.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었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프랑스 친구에게 하니 호탕하게 웃으며 "그건 내 소울푸드야!"라고 말한다.
어렸을 때 학교 끝나면 엄마가 늘 주시던 간식이라며, "거기에 버터까지 바르면 음~ 트호 봉 (trop bon, 너무 좋지!)" 이란다.
그러면서 요즘 아이들이 먹는 과자와 케이크류는 사실 진짜 구떼가 아니라는 것이다.
꽤나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였다.
바게뜨는 밀가루, 물, 이스트와 소금이 다가 아닌가?
여기에 작은 초콜릿 조각 하나 얹는다고 해도 설탕과 첨가물 범벅의 과자들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프랑스 사회에서 바게뜨가 차지하는 상징성은 바게뜨법이라고도 불리는 "빵에 관한 법령" (Le Décret Pain, 1993)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법에 따르면 정통 바게뜨, 즉 바게뜨 트라디시옹(baguette tradition)이라고 부를 수 있는 빵에 들어가는 재료는 단 네 가지, 밀가루, 물, 효모, 소금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바게뜨 트라디시옹은 상대적으로 두껍고 바삭한 크러스트와 쫄깃한 속살이 특징이다.
바게트 파리지엔 (baguette Parisienne)은 바게트 클라식 (classique) 또는 블랑쉬 (blanche)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첨가물 사용이 허용된다.
때문에 천연효모 대신 퀵이스트를 사용해 빠르게 대량 생산되기도 하고, 크기도 더 크면서 겉이 얇고 식빵 같은 질감이 강하다.
요즘은 바게뜨도 종류가 다양해져서 각종 곡류를 섞은 세레알 (céréales), 스펠트밀을 사용한 에포트흐 (épeautre)도 자주 보이고, 우리 동네 한 빵집의 인기 바게뜨는 훈제 보리로 만들어 색이 검고 미묘한 불맛이 난다.
바게뜨 초심자라면 일단 "윈 트라디시옹 실부쁠레" (une tradition, s'il vous plaît)를 말하고 정통 바게뜨 하나를 사는 것을 추천한다.
여기에서 취향에 따라 더 바짝 구워진 것 (비앙 퀴트 bien cuit) 혹은 덜 구워진 것 (빠 트호 퀴트 pas trop cuit)을 요청할 수 있다.
또 하나의 팁은 바게뜨를 반만 사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
단순한 재료로 만들어진 바게뜨는 금방 수분을 잃기 때문에 반나절만 지나도 딱딱해진다.
혼자 먹을 바게뜨를 사거나, 여러 빵집의 바게뜨를 두루두루 맛보고 싶을 때는 "윈 드미 바게뜨 실부쁠레" (une demi baguette, s'il vous plaît)라고 말하면 된다.
바게뜨라는 단어를 듣고 고소한 향을 풍기는 겉바속쫄의 길쭉한 빵을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게 당연하지만, 사실 프랑스의 바게뜨 유니버스는 훨씬 거대하다.
아시안 식당에 들어가 "레 바게뜨" (les baguettes)를 찾는다면, 테이블 위에 빵 대신 젓가락이 놓일 것이다.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지휘자가 흔드는 지휘봉 역시 바게뜨이고, 드럼 연주자에게 바게뜨는 드럼스틱을 말한다.
우리 아이들이 아무 막대기나 잡고 걸핏하면 외치는 "바게뜨 마직크" (baguette magique, 요술 바게뜨)는 만화 속에 등장하는 요술봉이나 마술사의 마술봉을 뜻한다.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고 "바게뜨 같은 머리카락" (cheveux comme des baguettes)을 가졌다고 말한다면, 아주 곧고 긴 머리카락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바게뜨로 이끌다" (mener à la baguette)는 누군가를 매우 엄하고 강제적으로 다룰 때 쓰는 말이고, 반대로 "바게뜨에 순종하다" (obéir à la baguette)라고 하면 아무런 토달지 않고 무조건 복종함을 뜻한다.
한 달이 넘는 여름휴가를 마치고 파리로 돌아갈 날이 얼마 안 남았다.
어젯밤, 벌써 일곱 살이 된 딸아이에게 물었다.
"파리로 돌아가면 뭐가 제일 먹고 싶어?"
프랑스 밖에서 휴가를 보내고 파리로 돌아갈 때 꼭 딸에게 물어보는 단골 질문이다.
이번에도 아이는 한 치의 고민 없이 같은 답을 외친다.
"바게뜨!"
버터 풍미 가득한 크로와상도, 달달한 빵오쇼콜라도 아닌 그냥 바게뜨라니.
한식의 정수는 결국 윤기 좔좔 흐르는 너무 질지도 까끌거리지도 않은 흰쌀밥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쌀밥을 한 술 크게 뜨고 싶을 때 그녀는 갓 구운 바삭한 바게뜨를 한 입 베어 물고 싶다는 것이다.
파리의 주말 아침, 아직 조용한 거리를 나서면 심부름을 나온 아이들이 바게뜨를 대여섯 개씩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간다.
일요일 오후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그리고 아이들까지 함께 모여 긴 점심 식사를 즐기는 한 가족의 모습을 그려본다.
<빠리냠냠 레시피> 바게뜨 초콜릿 샌드위치
재료: (맛있는) 바게뜨, (맛있는 가염) 버터, 좋아하는 초콜릿
1. 바게뜨를 반으로 가르고 버터를 바른다.
2. 초콜릿 조각을 올린다.
3. 바게뜨를 닫고 한입에 베어 먹는다. 본아페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