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혼녀의 삶
나는 좀 오랜 역사를 지닌 회사를 다니고 있다. 창립한 지 꽤 되어 역사가 깊고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다닌 회사.
이런 회사는 옛날 방식의 직원 관리가 몸에 배어 있다. 서슴지 않고 가족관계를 물어보거나 집이 자가인지 물어보거나 MZ 세대가 기겁할 사적인 질문들도 막 한다. 정말 아무렇지 않게, 부모님은 무슨 일을 하시니부터 해서... 정말 이게 왜 일하면서 필요한지 모르겠다.
대표적으로 비상 연락망에서 나는 또 놀랐다. 나는 부서 비상 연락망을 관리하는데, 너무 웃긴 게, 비상 연락망에 비상연락처를 쓰는데 꼭 무슨 관계인지 써야 한다는 거다. 관계가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뭐 비상시 연락을 하다 보면 나랑 어떤 관계인지 물어보는 게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는 경찰서나 병원이 아니라는 거다. 법적보호자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저 이 사람이 연락만 되면 되는 거다.
위급상황을 위해 남겨둔 번호면 어련히 중요한 사람의 번호를 남겼을까...
그냥 그렇게만 여기면 안 되는 건가?
이 회사의 정말 소름 끼치는 문화는 이거다. 결혼하면 '배우자'번호를 써야 한다는 거다.
결혼을 했는데, 배우자 번호를 쓰지 않는다? 생각보다 이상한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만들어버린다.
결혼을 했다고 부모와의 인연이 끊기는 건 아니지 않은데,
참... 왜 엄마 번호를 썼냐고 물어보는 게 참 신기했다.
그래서 내가 관리하면서는 절대 어떤 이유든 물어보지 않고, 책임 보직자 외에 다른 사람에게 바로 공유를 하지 않았다.
그냥 비상연락처만 남기면 되는 거 아닐까?
어떤 회사 분이 이혼을 하셨다. 그래서 그 이후로 어머니 번호를 쓰셨는데, 그 이유를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머 맞네 맞네..." 이런 것부터 해서 정말 각양각색이다.
뭐가 맞아. 그러든 말든 무슨 상관인지 정말 궁금하다.
배우자 번호를 쓰지 않는 걸 뛰어넘어서 왜 부모님 번호도 아버지 번호를 쓰냐고도 물어본다. 어머니가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자매나 형제의 번호를 써도 부모님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자녀의 번호를 써도 배우자와 이혼을 했거나 별거, 사별 별별 의문을 만든다.
이 회사는 미혼이면 '엄마'번호 기혼이면 '배우자'번호를 기입해야 그냥 넘어간다.
배우자 번호가 아니라는 걸로 미혼 기혼이 한눈에 보이고, 배우자 번호가 없어서 새삼 서러워해야 하나 싶었다.
이런 시선이 내가 미혼녀로 살아가는 게 굉장히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다른 회사들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회사의 룰 같은 건가 보다.
나도 배우자 번호 당당히 쓰고 글씨 크기도 140%로 올리고, Boldic 체로 바꿔서
나 결혼했소... 나 배우자 있소.... 내 보호자는 내 남편이오
내 남편 번호요....라고 하고 싶다.
정말.... 쉽지 않은 30대 미혼녀의 삶이다.
쉬운 건 하나도 없지만, 세상 결혼을 안 해도 쉽지 않고 결혼을 해도 쉽지 않고
그럼 어쩌란 말이냐..... 내버려 둬라 내버려 둬
회사에선 일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