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가든 시즌 2의 시작
때는 코로나라는 것이 우리에게 올지 몰랐던 2019년 가을, 나는 나의 첫 꽃집을 그만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화훼장식기능사, 꽃집 창업반, 작업실 생활로 차근차근 준비해서 꽃집을 오픈했고, 동시에 전문가반까지 수료하면서 꼬박 2년 반을 거의 주말도 없이 일했던 나는 그토록 사랑했던 나의 자그마한 꽃밭을 떠나야 했다. 일종의 번아웃이었을까, 나를 세상에 플로리스트로서 설 수 있게 해 준 소중한 공간이었지만 일단 그 공간을 벗어나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그리고 시작된 캐나다 생활은 예기치 않게 2년, 3년을 넘어갔고 결국 나는 작년 여름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건강 문제로 전신마취 수술을 두 번이나 받고 난 후 어느 초겨울 날, 나는 다시 플로리스트로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아가든을 그만두고 꽃집 근처에는 갈 수도 없었고, 어떤 때는 꽃을 보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아마 나는 꽃들의 비명들을 듣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매일 다듬고 자르던 꽃들의 비명을. 미아가든 시즌 1을 끝낼 때쯤 나에게 남은 질문은 "나의 플로럴 디자인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였다. 경영상의 이유로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노력한 만큼 나의 꽃들은 팔렸고 예쁘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이상의 것을 원했던 것 같다.
미아가든에 있었을 때 여성 고객들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꽃집에서 일해서 너무 좋겠어요. 예쁜 꽃도 매일 보고..."였다. 나는 당연히 수긍했지만 한 마디 덧붙이곤 했다. "생각보다 힘든 직업이지만 전 좋아서 하는 일이에요." 돈 버는 일 중에 쉬운 일이 어디 있을까, 다들 알지만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꽃을 상품으로 내놓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들을 플로리스트들이 기울이고 있는지를 말이다. 플로리스트로서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지만 가슴에 담아둔 채 적절한 창구를 찾지 못했던 것 같다. 블로그에는 거의 상품 홍보성 글만 썼었고 인스타그램에는 사진 위주로 올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문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대충 글을 써서는 안 된다는 알량한 자존심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아무 두려움이 없다. 꽃을 하는 것이나 글을 쓰는 것이나 힘을 빼고 흘러가는 대로 둘 것이다. 몇 년을 마음에 물이 고이게 두었더니 정말 사랑하던 일도 떠나야 했었다. 그 불투명한 마음들을 몇 년 동안 흘려보내고 나서 나는 미아가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실로 오랜 기다림이었다.
* '그러니까 식물들도 비명을 - 그것도 크게 지르지만, 단지 우리가 들을 수 없을 뿐이라는 게 연구진이 내린 결론이었다.' _ 우연히 읽게 된 루시드폴의 에세이 <모두가 듣는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