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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시옷 Feb 01. 2024

홍상수는 잘생겼다

그런가?



"형 홍상수는 잘생겼어." 찬구의 말을 듣고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내가 알기로 찬구는 군산의 아들이자 최전방 부대에서 만기 병장 전역을 한 대한의 건아, Z세대의 거두인 00년생임과 동시에 나이에 맞지 않는 폭넓은 앎을 갖춘 이 시대의 진정한 지식인 청년이었기에 나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안과에 검진받은 지 얼마나 지났니? 눈은 비싸기에 소중한 보물이야."라는 말을 겨우 집어삼키고 밭은 숨을 내쉬는 데 그쳤다. 나는 끝끝내 굴복하기로 결심해야 할까? 홍상수는 잘생긴 얼굴의 소유자이며 그의 깊은 이마 주름 안에는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무한한 소우주가 자리하고 있노라고 나는 확신하고, 인정해야 할까?


스미 시게히코의 얼굴론에 따르자면 그의 감자 같은 얼굴은  세상을 구성하는 도형이자 그중에도 두드러진 기호임이 틀림없을지도 모른다.  얼굴론이 뭐냐면 쉽게 설명해서 영화에 있어 영화배우의 얼굴 형태가 매우 중요하다는 논리다. 자세히 알고 싶다면 <영화의 맨살> 참고하도록 하자. 물론 나는   구절도 이해하지 못했다. 참고로 지금까지 얼굴론을 이해한 유일한 사람은 정성일 하나라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그것도 거짓말이라 보는  타당하다. 원래 평론가란 모두 거짓말쟁이들이다. 말하자면 정성일은 거짓말쟁이의 거짓말을 이해한 척하는 거짓말쟁이인 것이다.


거짓말쟁이들은 보통 자랑을 좋아하며 음흉한 속내를 가리기 위해 집에서 거울을 보며 끊임없이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하는 유우머(지성인들은 '조-크'라고 일컫는 행위)를 연습하거나 심지어는 빨간 뿔테를 면상에 얹어보기도 한다. 때문에 평론가들은 보통 방구석 찐따 출신이 많다. 홍상수는 '정성일들'을 본인의 그루피로 변모시켰다. 보통 우리가 한 사람에게 푹 빠져들도록 하는 가장 큰 요인이 외모라는 점은 이미 갓난아기도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어쩌면 홍상수의 외모가 음험하고 교양 있는 사내들의 마음까지 휘어잡을 수 있는 수준에 위치해 왔던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부럽다 홍상수.


잘생긴 남자들은 다 얼굴값 해.


하지만 역시나 수상하다. 내가 아는 잘생긴 얼굴들이란 적어도 이런 얼굴들이다. 홍상수가 이들과 닮았나? sex적으로(그리고 아마 gender적으로도 그럴 것 같은데 혹시 모르는일이니까 유보해보기로 한다) 같다는 점은 인정하는 바이나, 그 외에는 정말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찬구가 그렇게 말했다면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음이 지당하기에 나는 다시 한번 내 의심을 재고해 보기로 한다.  




홍상수는 잘생겼나?


무언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기준을 세우는 게 우선이겠지. 따라서 나만의 잘생김 리스트를 만들어보도록 하겠다.


표준국어 대사전에서 '잘생겼다'의 사전적인 정의를 찾아보니 '사람의 얼굴이나 풍채가 훤하여 보기에 썩 좋게 생기다.'라고 한다.

1. 잘생김은 얼굴과 몸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帅'은 군의 지휘관, 즉 '장군'을 뜻하는 말인데 형용사로 쓰일 경우 잘생기다는 의미를 갖게 된다. 고대 중국의 장군이란 출세에 성공한 자로서 권력과 부를 표상하고, 당시 장군은 대게 남성뿐이었으니 남성성을 표상한다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즉 당시 사회의 에피스테메에 근사한 외모인지의 여부가 잘생김의 주요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잘생김이란 도덕적 특성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 잘생김은 당시 사회의 인식과 맞아떨어져야 하며, 남성성을 표상한다.



우리 엄마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생겼다고 끊임없이 주장해 왔다. 이를 현대 사회에서는 가스라이팅이라고 부르는데 굉장히 악독한 행위이다. 한창 가스라이팅 당했던 초등학생의 나는 당시 친구들 앞에서 당당히 나의 외모를 예찬했고, 그렇게 내 인생 첫 번째 왕따 생활이 시작됐다. 나의 외모는 그대로인데 의견이 나뉜 것이다. 즉 타자의 관념이 중요하다는 것인데, 이는 잘생김이 가진 윤리적인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군.

3. 잘생김은 타인에 의해 결정된다.



부조리한 세상을 증오하며 단식을 시작한 고등학교 시절에, 약 한 달 만에 살이 12kg가 빠지며 키가 15cm 이상 큰 적이 있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서 술에 취해 바지를 내린 정재영의 행위만큼이나 급작스럽고 놀라운, 큰 변화였다. 그때 느낀 것 같다.

4. 잘생김은 후천적으로 얻을 수도 있다. 



아 그러면 이런 명제도 성립되겠다.

5. 나는 잘생겼다.


자 그럼 홍상수의 얼굴은 어떤지 한 번 보도록 하자.





다분히 객관적인 홍상수 얼굴 분석


우선 최대한 객관적으로 분석해 보기 위해 인류의 빅데이터, 관상을 이용해 보도록 하겠다. 홍상수는 이 매섭고 눈썹이 아래로 내려갔으며 귓불이 없고 둥근 에다 인중이 가지런하고 작은 을 가졌다.

이는 곧,

지도자 형 인간이자 자신의 의견을 확실히 말하는 스타일이며 어떠한 분야에서도 윤곽을 드러내는 인물이고 스태미나가 뛰어남과 동시에 좋은 가정환경에서 자란 미적 감각이 뛰어난 자의 관상이다(*단 과식에 주의할 것).

오. 이 정도면 꽤나 정확하지 않은가. 역시나

6. 관상은 과학이다


하지만 우리는 외모 이외의 한 가지를 더 고려해야 함을 알고 있다. 바로 몸인데, 역시 관상으로 판단이 가능하다. 정확히는 '체상'이다. 풍채가 좋고, 살집이 있으며, 어깨가 넓고 당당한 자세로 여유로운 걸음걸이를 가진 근육질의 몸이 좋은 체상이라고들 한다.



아 아쉽게도 홍상수는 좋은 체상을 가지지는 못 한 것 같다. 그렇다면 그의 외모는 잘생겼다고 볼 수 있나? 그가 현시대가 요구하는 잘생김에 부합하는 얼굴인지 보도록 하자.

 



WWH worldwide handsome으로 뽑힌 BTS의 뷔와 홍상수의 공통점을 찾아보려 애썼으나 나의 역량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아무래도 시대가 원하는 얼굴형은 적어도 아니라는 결론이다. 외면적 평가는 여기서 종료다. 홍상수는 잘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찬구는 그럼에도 이를 악 물고 홍상수가 잘생겼다고 주장하지 않았나. 나는 마침내 때가 된 것 같아 전화기를 들었다. "어 찬구야. 오랜만이다. 근데 홍상수는 어디가 잘생겼나?"



7. "홍상수는 분위기가 잘생겼잖아. 목소리도 좋고."


아 그렇네. 분위기가 잘생길 수 있겠네. 분위기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지니는 독특한 느낌.'이라고 한다. 느낌은 얼굴 형태로 판단하기보다는 오히려 표정, 음성, 행동, 생각과 같은 보다 감각적이고 추상적인 지표를 기준 삼는 게 더욱 정확해 보인다. 그리고 이는 개인의 도덕적, 윤리적 가치관이나 개인을 둘러싼 주위의 평판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확실하다.


다름이 아니라 초등학교 시절 내가 짝사랑하던 지원이는 나의 애틋한 고백에 부끄러워하며 생각할 시간을 줄 것을 조심스래 요구했고, 길고 긴 밤이 지난 그다음 날 그녀는 부반장인 민재와 연애를 시작했다. 민재는 나 같은 아웃사이더에게까지도 말을 걸어주는 친절한 놈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애들은 민재를 잘생겼다고 말했다. 그 자식 얼굴은 나보다 못생겼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분기탱천할 노릇이다. 지원아 잘 지내니? 난 행복하다. 넌 꼭 나보다는 덜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럼 홍상수의 평판을 알아보도록... 아.

8. 이건 그만 알아보자.


그렇다면 홍상수의 가치관을 알아봐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사유가 구체화된 영화를 분석하는  좋은 방법이   있겠으나 곤란한 것이 사실 내가 찬구 정도의 뛰어난 식견이 없어서, 영화를 봐도 이해도 못하고 분석도 못하는 저열하고 미개한 인간인지라 무리가 있기에 그렇다. 게다가 홍상수의 영화를 얼마 보지도 못했다. 기껏해야 <돼지가 우물에 빠진 >, <생활의 발견>, <극장전>, <하하하>, < 알지도 못하면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인트로덕션>, <당신 얼굴 앞에서>, <소설가의 영화>, <물안에서> 정도이며 당연히 홍상수의 팬도 더더욱 아니다. 생각해 보니 찬구는 홍상수 영화를  봤다고 했는데 역시 멋져 대단해.

9. 찬구는 밥 먹으면서 홍상수 영화를 본다.


다만 그의 영화 속 키워드는 반복과 차이로 알고 있다. 마치 장자가 소요유에서 주장하듯, 사유를 확장하고, 가로막는 온갖 굴레를 벗어던져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하지만, 실제로 벗어던지는 건 옷가지 정도에 불과한 인물들이 항상 등장하고, 모든 인물들은 철장에 갇혀 정형행동을 일삼는 동물원 동물처럼 이상행동을 반복하다 그냥 그렇게 이야기가 닫힌다.


정확히는 닫혔다. 왜냐하면 내가 느끼기로 홍상수의 영화 속 인물들은 죄다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지만 이야기만큼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열린 채로 종결을 맺는 구성으로 보였기에 그렇다. 이전에는 냉소적으로 인물들을, 그리고 그런 인물들을 가둬 놓은 동물원 같은 세상을 놀리는 데 그쳤다면, 점점 인물들을 따스하게 바라보고 그 동물원 우리를 열어주는 느낌이랄까. 장자가 그랬듯, 누구를 상대적으로 틀렸다 가정하고 비난하고 조소할 필요는 전혀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런 가치관만큼은, 적어도 나는 꽤 잘생겼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을 잘 살기 위한 방법론적으로 따져 보았을 때, 적어도 현재로서는 홍상수가 견지하는 사유가 꽤나 정답에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장자처럼, 들뢰즈처럼 홍상수는 반복을 이해하여 차이를 발생시켜 왔다. 차이란 변화이자 확장일 수도, 성장일 수도, 퇴행일 수도 있으나 이것만은 확실하다. 그는 못생긴 외모로 무던히도 남다른 삶을 꾸준히 살아가며(반복) 조금씩 잘생김을 발생(차이)시켜왔고 이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분위기적인 모호한 개념이다. 그리고 찬구 같은, 거짓말쟁이 평론가들 같은 지적인 인간들의 눈에는 퍽 잘생겨 보일 수 있다는 결론이다. 정말.

10. 대단하다 홍상수.



홍상수는 잘생겨지고 싶나?


잘생김이란 당시의 에피스테메에 부합해야 하며 성공(권력, 부)이 표상됨을 앞서 말한 바 있다. 반대로 말해 보자면 잘생김을 얻기 위한 인간의 동기란 성공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말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저 성실히 왕따 생활을 거쳐 온 나에게 있어 세상에 대한 본인의 인정 욕구를 내포한다는 의미로 해석됨과 동시에 , 누군가의 관심, 즉 사랑을 받고 싶다는 갈망의 의미로도 읽힌다.


홍상수는 잘생겨지고 싶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잘생겨지고 싶었을까? 궁금하기는 하나 이대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추론의 영역일뿐더러 위험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그리 흥미롭지는 않은 질문이기에 그렇다. 왜 흥미롭지 않냐고 묻는다면, 다들 알잖아요.


다만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들의 눈에 부합하는 외모를 가꾸지 못할 심산이라면, 누군가는 잘생기다고 생각할 법한 자신의 매력적인 부분을 개발하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면 나같이 홍상수의 외모에 큰 반감을 가진 사람도 다시 한번 생각을 재고하게끔 만들 수도 있으니 퍽 의미 있지 않은가. 오 찬구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형. 근데 나 지금은 홍상수 별로 잘생겼다고 생각 안 하는데?"


기껏 글 다 써놨더니 이런 인생에 하등 도움도 안 되는 손등의 모공 같은 놈. 다음 생에는 반드시 홍상수의 콧수염으로 태어나길 간절히 기도하마.

11. 찬구는 홍상수보다 못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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