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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어영 earyoung Jan 20. 2024

매일 쓰는 이유

심리상담은 1회에 10만원인데

옛날 일기장을 읽다가 눈물이 났다. 공채로 입사한 첫 회사는 지독한 조직문화로 업계에서도 이름난 곳이었다. 그중에서도 선후배 문화 엄격한 PD 조직에서 인턴을 거쳐 신입사원까지, 내가 당한 고난을 나열만 해도 책 한 권이 모자랄 것이다. 주말 밤낮 없이 주 80시간 이상 이어지는 격무, 선배들의 괴롭힘, 고백공격, 억지로 참석해야 했던 매일의 술자리 등등.


이 모든 역경이 일기장에 담겨있었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해서는 한 글자도 써있지 않았다. 처음엔 내가 잘못 본 줄 알았다. 어딘가 써있겠지. 써놓고 나중에 찢어버렸나? 하지만 누가 볼까봐 베개 밑에 소중히 품고 잤던 일기장은 실수로 찢어진 페이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혼란에 빠졌다. 내 인생을 뒤흔들고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그 사건을 도대체 왜 일기에 쓰지 않은 것일까.


‘그 일’은 내 팀장이라는 대머리 노총각 새끼가 나를 지속적으로 성추행한 일이었다. 이 문장을 써놓고 보니 갑자기 알 것 같다. 내가 왜 일기에 이 이야기를 쓰지 않았는지. 이 문장을 적을 수 있게 되기까지 9년이 걸렸다.


수 년 동안 나는 성폭력 피해자의 모든 사고회로를 경험했다. 처음엔 내가 잘못했나, 스스로를 돌아봤다. 납득이 되지 않자 혹시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나, 의심했다. 그도 아닌 것 같자 내 인사평가를 손에 쥐고 있는 그 사람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어떤 노력으로도 왜 내가 그런 일을 당해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매일 일기를 쓰고(비록 마음 가장 밑바닥에 있는 말은 쓰지 못했지만)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면서 한편으로 이직을 준비했다. 빨리 이직에 성공하는 것만이 길이라고 믿었다.


이직에 성공한 뒤로 몇 년 동안은 책도 읽지 않고 일기도 쓰지 않았다. 기나긴 번아웃이었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좋았다. 여행을 다니고 술을 마시며 몇 년을 보내고, 문득 공허해졌다. 하루하루 바쁘게 살고는 있었지만 어제 누굴 만나 뭘 먹었는지조차 흐릿했다. 용기를 내어 다시 일기장을 샀다. 모닝페이지라는 게 유행을 하기 시작할 때였다. 아침에 30분만 시간을 내어 3쪽을 쓰면 된다고 했다.


그렇게 다시 쓰기 시작했고 지금은 3년째 매일 모닝페이지를 쓰고 있다. 30분 동안 열중해서 뭐라도 쓰고 나면 요가 수련 후 사바아사나로 누웠을 때처럼 온몸이 저릿저릿 상쾌하다. 허공에 부유하던 마음이 비로소 땅에 발을 딛고 단단히 선 기분, 마음의 노폐물이 싸악 빠진 느낌으로도 표현할 수 있겠다.


모닝페이지를 쓰면서 가장 달라진 점은 쓰기 싫은 내용이 있어도 억지로라도 써보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모닝페이지의 제1원칙은 솔직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기검열을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다. 방어기제라는 방패막 뒤에 숨어 다시 캄캄한 몇 년을 보내게 될 지도 모른다.




누구나 용기를 내서 나는 이런 사람이고,
이런 것들이 현재의 나를 만들었고,
지금 나는 여기에 있다라고 말할 때
마법이 일어나고, 건강이 회복되고, 치유가 시작된다.
< 내 삶의 이야기를 쓰는 법> 중에서




생각해보면 상사의 성추행이라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오면서 앞이 보이지 않아 더듬거리던 내 손을 잡아준 건 매일 일기를 쓰는 행위였다. 내 마음을 모두 종이에 쏟아낼 용기까지는 없었지만 적어도 나를 긍정하는 데 도움이 됐다.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나는 그 사람을 용서할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용서해야 했기 때문이다.


글 쓰는 건 솔직히 어렵다. 특히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을 쓸 땐, 내가 이렇게 빡대가리(?)였나 싶다. 잘 쓴 글을 보고 오면 상대적 박탈감에 한 대 맞은 것처럼 어질어질하다. 초고로만 남기고 발행하지 못한 글도 많다. 심지어 한 번 쓰고 다시는 찾아보지 않는 글도 수두룩하다.(대부분의 모닝페이지가 그렇다.) 하지만 괜찮다. 씀으로써 나는 치유되고 있다.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경험을 쓰는 것이 아니다.
경험에 대한 해석, 생각, 고통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헝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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