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 전화번호부 같은 너
KBS, MBC로 대표되던 지상파가 저물어 지상파 채널은 구세대만 보는 유물이 되었고, 종합편성채널은 각 방송사의 대표 채널만 잘 나갈 뿐 그마저도 OTT로 본다. 세대를 불문하고 좋아하는 유튜버들의 채널을 구독하는 시대고, 유튜브를 통제할 수 없으면 더 이상 국가 주도의 방송 통제도 어려운 상황이다. 학교 수업의 중심 뼈대가 되는 교육과정은 어떨까? 초등교육과정은 지상파, 종편, 유튜브 중 어디에 해당할까?
국가 교육과정 중심으로 운영되는 지금의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교육부가 과목은 물론, 과목별 시수까지 정하고 과목별 교과서까지 제공한다. 전국 어디로 전학을 가든 모든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조금씩 달라 보일 수 있으나 뼈대는 비슷한 다이소식 교육과정이다. 각 학교에 과목별 시수 조정 권한이 부여되고 검정교과서가 들어오면서 종편처럼 변하고 있으나, 여전히 국가교육과정에서 제시하는 과목별 성취기준이 지나치게 상세해 교육과정을 자세히 뜯어보면 학교별로 크게 다르지 않다.
2022년 개정교육과정이 반영된 올해 1학년 교육과정은 국어, 수학, 통합교과, 창의적 체험활동으로 이루어지는데, 교육과정 개정 대상은 주로 통합교과다. 2015년 교육과정에서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자연스러운 계절 변화에 따른 주제와 활동들이 주를 이뤘다면 2022년 개정교육과정에는 탐험, 약속, 이야기 같은 다소 추상적인 주제에 억지로 끼워 맞춘 활동들이 제시되어 있다. 매일 통합교과 수업을 교실에서 하고 있노라면 학생을 위한 수업이 아닌 수업을 위한 수업을 하는 느낌이 계속 드는 것은 주변 선생님들의 공통된 견해다.
이처럼 부자연스럽고 이물감이 느껴지는 수업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국가교육과정의 존재감이 너무 커서 교사가 학교 상황과 학생 수준에 맞게 독자적으로 수업을 진행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현장 경험이 부족한 사람들이 과목 논리에 따라 구성한 교육과정과 교과서라는 틀에 갇혀 교사는 옴짝달싹 못한 채 끌려가는 상황이다. 대략의 성취기준만 정해주고, 나머지는 교사가 주무를 수 있어야 교사 스스로 수업에 주인의식이 생기고, 교실 환경에 알맞은 교육과정을 준비해 수업 전문가로 거듭날 수 있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1학년은 교사들이 맡기 가장 꺼려하는 학년이어서 교사들이 수업에 주인의식을 가지기 어려운 것도 현실이다. 1학년 신입생들은 성별, 생일, 국적 등의 정량적인 기준에 따라 임의 분류되어 각 반으로 배정되는데 학생의 정서, 태도는 반영되지 않은 채로 배정된다. 교사 입장에서 힘든 학생이 몰리는 교실이 생기고, 그만큼 정신적 스트레스랑 감정 소모가 심한 복불복 학년이 1학년이다 보니 새로 전입한 교사들만 가득한 학년이 되었다. 운 나쁘게 1학년에 배정된 교사들 중 소수를 제외하고는 언제든 다른 학년으로 넘어갈 마음을 품고 있으며, 실제로 1학년 담임은 오래 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학교라는 새로운 조직에 갓 들어온 신입생들을 위한 온갖 행정 처리를 해야 하고, 규칙을 반복해 설명해 신입생을 학교에 제법 어울리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다 보면 진이 빠지기 마련이다. 이상 행동을 보이는 학생을 추적 관찰해 부모님과 일년 내내 소통해야 하는 일도 계속 있기 때문에 매년 믿고 거르는 학년이 1학년이 된 지 오래다.
맞벌이하는 부모를 위해 저학년 학생들이 학교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 때문에 1학년이 일 년에 이수해야 할 차시는 교육과정 개정 때마다 계속 늘어나고 있다. 학업 시간만 늘리는 게 능사가 아니다. 노동 시간과 생산성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통계적 사실이기 때문에 학생들이 어떤 방과후 시간을 보낼지 디자인하는 큰그림이 필요한 시기다.
국가교육과정은 필수적인 영역에만 관여하고, 현장에 있는 교사들의 자율성을 존중해야 교사들이 살아난다. 보통 아이들과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 모두가 다닐 맛 나는 학교가 되려면 교사에게 지금보다 더 많은 자유가 필요하다. 구성원이 핵심 업무를 할 수 있는 권한은 부여하지 않으면서 잡다한 의무만 늘리는 조직은 필패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