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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점 Feb 11. 2024

제6화 불쾌함, 프레임과 분업화의 콜라보

 “돈이 많은 사람들은 다 그런 걸까요? 하나 같이 공통점이 돈이 많아요. 돈이 많은 데 겸손하고 존경할만한 사람은 왜 안보이죠? tv에서는 종종 있던데.”

 “있지. 있는데 겸손한 사람들은 원래 눈에 잘 안 띄어.”


 요 며칠 허세를 장착하고 무언의 인정을 갈구하는 손님들이 펍에 많이 왔다. 그런 나의 하소연을 들은 희준오빠가 말했다.


 희준오빠는 7년 전 제주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인연이다. 그때 묵었던 게스트하우스에 나까지 포함해서 총 8명의 게스트가 숙박했고 그게 인연이 되어 7년째 종종 모임을 갖고 있다. 이번엔 스케줄이 맞는 사람들 4명만 모여 제주에 내려왔다. 그중 한 명이 희준오빠이다.


 희준오빠는 최근에 박사 논문을 마무리했다. 논문 주제는 ‘전문가와 비전문가가 공간을 보는 시선의 차이’이다. 오빠의 논문 주제와 맞물려, 오빠가 내뱉은 저 한 문장이 내게 크게 다가왔다.


 평소 나는 ‘프레임’ 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프레임’ 과 ‘시선’ 은 동일한 맥락의 단어이다. 나는 늘 내가 가진 ‘프레임’ 을 점검하고 내가 놓친 ‘프레임밖에 위치하는 것들’ 을 인지해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내 프레임의 초점이 돈이 많고 인정을 갈구하는 어떤 사람들에게만 맞춰져 버린 걸까. 확실한 건 자극에 치여 프레임을 점검해 볼 생각을 잠시 놓치긴 했다는 점이다.


 나는 타인의 허세가 불편하다. 타인이 허세를 내비칠 때는 대체로 무관심으로 답하거나 내가 본 팩트를 이야기하는 편이다. 영혼 없는 인정의 화답은 잘 못 건네겠다. 하지만 스탭이라는 나의 역할이 있기에 허세에 대한 인정을 갈구하는 손님들에게 무관심을 내비칠 수도, 팩트를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영혼 없는 인정의 화답을 억지로 건네다 보면 내 영혼은 괴로움에 휩싸이곤 했다. 영혼 없는 수많은 인정과 질문을 내건내는 직원 혜선이를 보고 있자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능력이다 싶었다. 나는 그런 능력이 없는 사람임을 다시 한번 절실히 깨달았다.


 대체로 내가 본 허세는 ‘돈’ 이라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자신이 타고 다니는 차, 계약한 비싼 집을 이야기하며 혼자서 많은 칵테일을 시킨다. 이야기를 하다 친분을 쌓은 옆 손님에게 자신이 산 메뉴를 대접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여자 친구와 맞지 않다며 하소연을 하고 험담을 늘어놓는다. 그리곤 걸려온 여자친구의 전화를 받고 와서는 여자친구를 지칭하며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담는다.  


 ‘그럴 거면 대체 왜 사귀는 거예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지만 최선을 다해 삼킨다. 그럴 때면 영혼이 체하는 기분이 든다. 이러다 탈이 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사랑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대단한 갑옷을 입고 있다 하더라도 빛나지가 않는다. 오히려 그 갑옷 속이 텅 비어서 툭 치면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가끔은 나로 하여금 ‘저 위태로운 갑옷을 한 번 툭 쳐버리고 싶다’ 라는 어떤 공격성까지도  불러일으키곤 했다.


  ‘돈’ 이라는 갑옷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다만 ‘돈’ 보다 상대적으로 더 중요한 가치가 있고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써 ‘돈’ 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마 내 게는 그 가치가 사랑인가 보다. ‘사랑’ 으로 속이 가득 찬 ‘돈’ 이라는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아마 빛이 날 것 같다.

 

 그러다가 한편으로는 이것도 ‘다름’ 으로 존중해야 하는 부분인가 하는 고민이 들기도 한다. 누군가한테는 ‘돈’의 가치가 ‘사랑’의 가치보다 중요할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냥 대상의 차이이고, 상대적인 게 아닐까. 저 허세가 나한테나 허세지 어떤 타인에게는 허세가 아닌 존경이 대상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걸 인정하지 못하는 내가 편협한 게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불쾌함은 지속됐다. 그것까지 존중할만한 그릇은 못되나 보다. 나의 한계를 인정하기로 하고 불쾌함을 소화시키길  반복하던 중이었다.


 “교수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 많아. 네가 말한 ‘돈’이 ‘지식’으로 대체됐다고 보면 돼. ‘지식’이라는 허영으로 텅 빈 속을 감추고 뽐내며 권위를 부리는 사람들 참 많아.”

 “앞, 뒤, 옆 안 보고 한 가지만 좇는 거. 그게 문제일까요 그럼?”

 “그럴 수도 있지. 자신의 무언가를 희생시켜 가면서 한 가지를 얻었고 그 과정에 대한 보상심리로 권위를 인정받길 원하는 걸지도 모르지.”


‘대량생산이 시작되면서 분업화가 가속됐고, 어느 순간부터 한 우물만 파라가 성공의 지름길이 되는 문장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아내가 왜 우는지 모르는 유능한 의사가 탄생했다. 그게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이다. 인문학의 방향성은 얕고 넓게 아는 데에 있다.’ 라는 문구를 한 인문학자의 강연에서 인상 깊게 들었던 적이 있다. 내가 겪은 상황이 이 문구와 맥락을 같이 하는 현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 불쾌함은 나라는 개인의 프레임과 분업화라는 사회적 현상의 콜라보쯤 되려나. 사회적 현상은 내 통제 밖에 위치하지만 다행히도 프레임은 내가 바꿀 수 있다.


‘프레임의 위치를 바꾸자.’


 눈에 띄지 않던 다른 손님들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사실 눈에 띄는 허세를 내세우는 손님들보다 눈에 띄지 않던 겸손한 손님들이 수적으로 더 많았다.


 같은 맥락의 실수를 사실 학교에서도 자주 한다. 한 반에 있는 30명의 아이들 중 나를 힘들게 하는 아이들은 보통 2~3명 정도이다. 수적으로 나를 힘들게 하지 않는 아이들이 더 많다. 하지만 늘, 나를 힘들게 하는 아이들에게 시선을 빼앗기곤 했다.  그리고 그 프레임에 갇히기 일쑤였다. 그 프레임의 존재를 인식할 때면 다시 생각을 고쳐먹고 시선을 돌려보곤 했다.


 학교에서 그렇듯, 펍에서도 또 같은 프레임에 갇혀있었던 것이다. 부정적인 것, 불쾌한 것은 너무나도 쉽게 긍정적인 것, 좋은 것을 향한 시선을 본인에게로 돌려버린다. 아직도 원시시대에 머물러 있는 사람의 뇌에 장착된 생존본능이 자연히 그렇게 만든다고 한다. 내가 또 뇌한테 낚였다. 자주 낚인다.


  이제 부정적인 것, 불쾌한 것에 걸린 프레임의 갈고리를 조심스럽게 빼내어 눈에 띄지 않는 것들에 애써 걸어보자라고 다짐한다. 그래야 내 생존에 더 유리할 것 같다. 현대사회를 살아가기에 원시시대의 뇌는 너무 비효율적이다. 이제 좀 현대사회에 걸맞게 진화 좀 해주었으면 좋겠다.


‘다시, 봐보자.’


출근을 앞둔 나는 놀러 온 모임 멤버들과 내일 만나자는 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프레임을 재장착한 뒤 펍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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