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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니 May 18. 2024

눈 오는 휴게소

여행의 첫 번째 기억,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여행

“우와! 눈 온다!“

고속도로를 한참 달리던 차창 밖으로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뒷 자석에서 놀던 나는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아있던 엄마아빠에게 고개를 빼꼼 내밀며 소리쳤다. 내가 태어난 경상도에선 겨울에도 함박눈을 쉬이 볼 수 없었고, 그래서 눈이 오면 학교에서도 선생님들이 수업을 쉬고 운동장에서 놀게 해주곤 했다. 그럼에도 이 정도로 눈이 펑펑 내리는 건 내 짧은 인생에 처음 보는 광경이어서 더욱 신이 났던 것이다. 아빠는 잔뜩 기대에 찬 내 목소리를 듣고는, ‘잠시 눈 구경이라도 하고 갈까?’라고 말했고, 그렇게 우리는 어딘지도 모를 휴게소로 진입했다.


그 휴게소 건물 옆에는 조그마한 야외 테이블과 벤치가 여럿 있었다. 밝은 주황색의 벤치 위에 소복이 쌓인 새하얀 눈을 보고는, 그 누구도 만지기 전에 내가 가서 만져야 했다. 빨리 준비해 먼저 뛰어간 언니를 보며 마음이 급해져 발을 동동 구르며 신발을 신고 있으니, 엄마가 춥다고 내가 좋아했던 보라색 빵모자를 씌워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뿌리치고 가려는 나를 ‘내가 좋아하는’ 빵모자로 엄마가 회유를 해 겨우 씌워주셨던 것 같다.) 그러곤 언니와, 함께 갔던 사촌들과, 엄마아빠와 함께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며 짧은 시간 동안 눈을 만끽했다. 만들었던 눈사람도 데려가고 싶었지만, 차에 태워 소중한 눈사람을 녹여 죽이느니, 추운 곳에서 잠시라도 더 오래 사는 게 낫다고 판단하곤 눈사람의 안녕을 빌어주고 차에 올라탔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 이게 내가 가지고 있는 여행에 대한 첫 기억이다.

물론, 그 전후로 다양한 여행을 했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있었다. 어릴 적, 엄마아빠와 함께 시간 날 때마다 여기저기로 국내 여행을 다니곤 했었다. 너무 어릴 때라 한참을 잊고 살다가 몇 해전, 친언니의 회고 속에 언급된 당시의 순간 덕분에 그 기억이 다시금 새록새록 떠올랐다.

당시에는 주말마다 혹은 휴일마다 여행을 갔었는지, 언제 시간이 나서 여행을 다녔는지 인지하지도 못했다. 끽해봐야 초등학교 저학년생이었던 나는 “또” 여행을 간다는 사실에 마냥 기뻐할 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언니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촌들까지 데리고 여행을 다녔던 엄마 아빠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어린 나는 여행을 가는 날이면 신이 나 누구보다 먼저 아파트 뒤편의 주차장으로 뛰어갔고, 차 앞에 서서 문 열어달라며 열심히 차를 맴돌았다. 아빠가 스타렉스 뒷 자석을 눕혀 자리를 만들면 얼른 신발을 벗고 뛰어 올라가 좋은 자리를 선점하려고 욕심부리기도 했다. 다 눕혀진 자리에서 때론 언니와 나만, 때론 사촌들과, 때론 친척 어른들, 때론 옆집 소꿉친구네까지 함께 둘러앉아 한창 유행했던 ‘팅팅 탱탱 후라이팬 놀이’도 하고, 간이노래방도 개장하고, 그러다 지치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잠이 들기도 했다. 깨어있길 잘했던 어릴 적 나는, 피곤한 엄마와 자리를 바꿔 조수석에 앉아 지도책자를 읽으며 우리가 가는 길을 아빠에게 물어보고는, 가는 길 내내 아빠에게 이리저리 알려주기도 했다.


신기한 건 어디를 구경했는지, 어딜 여행했는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오직 한 곳, 그 눈 오던 휴게소 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심지어 그 마저, 위치도 모르고 눈이 많이 왔던 것으로 보아 어릴 적 살았던 경상도보다는 북쪽이지 않을까 짐작만 했다. 수년이 지나 언니와 둘이서 국내여행을 하겠다고 돌아다닐 때 아빠가, ”너네 어릴 때 거기 다 갔던 곳인 건 알지?“라고 하시면 그제야, ‘당시에 여기도 갔었구나’ 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많이 다닌 여행 중 목적지가 단 한 곳도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는 “그게 여행이 맞아?”라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목적지가 기억나지 않을 뿐, 내가 여행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길 위에 있는 모든 순간이 내게는 여행이었고, 그 여행에 대한 모든 기억들 속 나는 늘 행복했다. 차에서, 길에서, 휴게소에서, 바닷가에서, 산에서, 차박(이라고 지금은 부르지만 당시엔 숙박을 못 구해 그냥 차에서 노숙을 한 것으로 인지했다)을 하고, 힘들다고 징징거리고, 또 그러다 신나서 뛰어다니기도 했을 그 모든 순간들이 내겐 여행이었다. 그렇게 어릴 적부터 길 위에서 보낸 시간 덕분에, 나는 지금도 비교적 저렴한 숙소를 선택하고, 시간에 따라 공항노숙도 스스럼없이 하고, 슬리핑 버스는 오히려 반기며 좋아하는 여행자가 되었다. (그 대신, 하루라도 더 여행하고, 더 많은 걸 보고, 먹고, 경험하는 데에 시간과 돈을 쓰고 있다.)


그리고, 더 많이, 더 자주 여행하고 싶었던 내가 내린 결론은, 여행은 결국, 길 위에서의 순간들이란 것이다. 여기서 길은 물리적인 도로일 수도, 목표로 향하는 과정일 수도, 그게 아니면 그냥 잠시 멈춰서 있는 순간의 공간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모든 길 위에 존재하는 모든 순간이 여행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 앞에 펼쳐질 알 수 없는 인생의 길 위에 존재하는 순간 또한 여행이 되었다.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경험한 색다른 순간도, 일상 중에서 맞이한 마법 같은 순간도, 아니면 버티기 힘든 고통과 고난의 순간조차도.

그렇게 나는 인생의 모든 순간도 여행으로 생각하고, 매 순간순간을 더 풍요롭게 보낼 수 있게 노력한다. 더 다양한 여행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앞으로도 여행자로 살아갈 것이다.


여행: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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